피아골의 불사조, 불과 신념으로 빚어진 연곡사 박희정 기자 hoahn01@hanmail.net

2025년 10월 16일(목) 14:45

지리산 국립공원의 깊숙한 품으로 들어서는 길, 단풍으로 붉게 타오르는 ‘삼홍(三紅)의 계곡’으로 이름난 피아골의 물소리가 귓가를 채운다. 짙은 녹음과 청아한 물길이 세속의 번뇌를 씻어낼 때쯤, 마침내 연곡사(燕谷寺)가 수줍은 듯 모습을 드러낸다. 계곡의 굴곡을 따라 자연스레 자리 잡은 사찰은 산과 내가 하나가 된 듯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방문객에게 깊은 평화와 고요함을 선사한다.
그러나 이 평화로운 첫인상 뒤에는 짙은 역설이 숨어 있다. 비교적 최근에 지어져 단아한 멋을 뽐내는 대적광전과 요사채, 그리고 그 주변에 흩어져 천년의 세월을 묵묵히 견뎌낸 빛바랜 석조 문화재들의 극명한 대비. 목조 건축의 덧없음과 화강암 예술의 영원성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 기묘한 간극이야말로 연곡사를 이해하는 여정의 출발점이자 핵심 주제다. 연곡사는 단순히 고즈넉한 산사가 아니다. 이곳은 한국 역사의 비극적 층위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연대기이며, 통일신라 불교 예술의 천재성이 빛나는 증거이자, 불과 총칼 앞에서도 굴하지 않았던 불굴의 회복력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벽 없는 박물관, 연곡사의 영원한 보물들
연곡사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거대한 불길이 끝내 삼키지 못한 것, 즉 사찰의 정신과 역사가 오롯이 새겨진 석조 문화재들에 주목해야 한다. 사찰의 전각들은 반복적으로 소실되고 재건되는 운명을 겪었다. 하지만 9세기와 10세기에 조성된 석조 승탑(僧塔)들은 제자리를 지키며, 사찰의 물리적 육체(건물)는 역사의 변덕과 인간의 갈등에 취약하지만, 위대한 승려들의 정신적 유산과 예술적 정수가 담긴 ‘영혼’은 돌이라는 영원한 매체를 통해 영속한다는 사실을 웅변한다.
통일신라 후기, 9세기경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승탑은 아름답고 예술적으로 완벽한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누구의 사리를 모셨는지 명확한 기록은 없으나, 풍수지리의 대가 도선국사의 사리탑이라는 설이 오랜 세월 전해져 내려온다.
동승탑에는 불국정토의 모습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가장 아래 하단부에는 천상의 힘과 수호를 상징하는 용이 구름 속에서 꿈틀거리고(운룡문), 사방을 노려보는 위엄 있는 사자들이 불법을 지킨다. 가운데 중단에는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여덟 신장, 팔부중상(八部衆像)이 늠름하게 서 있고, 상단부에는 극락정토에 살며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한다는 상상의 새, 가릉빈가(伽陵頻迦)가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 있다. 동승탑에서 언덕 위로 조금 더 올라가면 만나는 북승탑은 고려 초기에 조성된 작품으로, 앞선 시대의 걸작인 동승탑을 의식적으로 계승하고 발전시킨 ‘예술적 응답’이다.
북승탑의 주인 역시 명확하지 않지만 현각선사탑비가 남아 있어, 고려의 고승 현각선사의 승탑일 가능성이 매우 높게 점쳐진다. 북승탑은 동승탑과 동일한 팔각원당형의 기본 구조와 안정적인 비례, 그리고 사천왕상이나 가릉빈가와 같은 조각 주제를 공유한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시대의 변화와 독창적인 해석이 엿보인다. 기단부 하단의 용맹스러운 사자상 대신 부드럽고 우아한 연꽃무늬를 새겨 넣었고, 지붕돌 처마 밑에는 동승탑에는 없는 비천상(飛天像)을 조각하여 천상의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켰다.

돌로 엮은 불심의 태피스트리
연곡사에는 두 국보 승탑 외에도 오랜 시간 사찰의 역사를 함께 해온 중요한 석조 문화재들이 즐비하다.
보물 제151호 삼층석탑은 통일신라 시대의 전형적인 양식에서 살짝 벗어나 있다. 일반적인 2단 기단이 아닌 3단 기단이라는 독특한 구조가 특징이다. 이 탑이 더욱 특별한 이유는 1967년 해체 보수 과정 중 3단 기단의 상층부 내부에서 천년의 세월 동안 잠들어 있던 작은 동조여래입상(銅造如來立像) 1구가 발견되어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이다. 불상은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또 다른 보물인 소요대사탑(보물 제154호)은 조선 시대인 1650년(효종 원년)에 세워진 이 승탑으로,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었던 연곡사를 1627년(인조 5년)에 중창한 소요대사 태능(逍遙大師 太能)을 기리고 있다. 통일신라로부터 이어진 팔각원당형의 전통을 잇고 있으나, 장식은 줄고 형태는 소박해져 조선 시대 특유의 단순하고 힘 있는 미감을 보여준다. 이 승탑의 존재로, 연곡사는 신라와 고려의 위대한 선사들로부터 조선 시대의 재건자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이어온 정신적 계보를 완성하게 된다.


불 속에서 벼려지다, 사라지기를 거부한 사찰
연곡사의 현대적 가람이 지닌 소박함의 이면에는 파괴와 재탄생의 극적인 순환사가 자리하고 있다. 세 차례에 걸친 전소(全燒)의 비극은 연곡사가 단순한 종교적 공간을 넘어, 국가적 수난의 역사를 온몸으로 겪어낸 상징적 현장임을 증명한다.
첫 번째 불길은 1598년(선조 31년), 정유재란의 광풍 속에서 타올랐다. 왜군의 칩임으로 잿더미로 변하는 비운을 맞았다. 이것이 연곡사 기나긴 수난사의 시작이었다. 1907년(순종 1년), 일제의 국권 침탈이 노골화되자 담양 출신의 의병장 고광순(高光洵)은 의병을 이끌고 연곡사를 근거지로 삼았고, 연곡사는 나라를 구하려는 이들의 피와 땀이 서린 저항의 심장부가 되었다. 고광순 의병장은 연곡사에 머물며 태극기에 ‘머지않아 국권을 되찾을 것이다’라는 굳은 신념의 표현인 ‘불원복(不遠復)’이라는 세 글자를 수놓은 깃발을 내걸었다. 이 깃발은 꺼지지 않는 저항 정신의 강력한 상징물로, 현재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의병의 근거지를 파악한 일본군은 연곡사를 기습 공격했다. 1907년 10월, 고광순 의병장과 그의 부하들은 압도적인 화력 앞에 결사항전했으나 결국 장렬히 순국했다. 이후 일본군에 의해 불태워졌다. 이 사건으로 연곡사는 불교 성지이자 동시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순국지라는 비장한 정체성을 덧입게 되었다. 현재 경내 한쪽에 세워진 ‘의병장 고광순 순절비’는 사찰의 이러한 복합적인 역사를 묵묵히 증언하며 오늘날 우리에게 역사의 교훈을 전하고 있다.

현대에 들어서는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의 주요 활동 거점이었던 피아골 입구에 위치한 탓에, 토벌군과 빨치산 사이의 치열한 전투에 휘말려 모든 전각이 다시 한번 불타버렸다. ‘피아골 전투’로 알려진 이 참혹한 역사 속에서 사찰의 지리적 위치는 전략적 요충지였고, 그 운명적 위치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시련을 겪어야 했다.

잿더미에서 피어난 평화, 오늘날의 연곡사
수많은 상처를 극복하고 불사조처럼 다시 일어선 연곡사는 오늘날 방문객들에게 역사와 자연, 그리고 현대적 영성이 어우러진 독특한 경험을 제공한다.
현재 연곡사의 가람은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대부분 1980년대에 새롭게 지어진 것이다. 비록 천년의 나이테를 품고 있지는 않지만, 이 현대의 건물들은 산비탈의 지형을 거스르지 않고 여러 단의 축대를 쌓아 자연 속에 스며들 듯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다. 이는 사찰의 진정한 주인이라 할 수 있는 고대의 석조 유물들을 압도하지 않으면서, 현대 불교 수행을 위한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려는 지혜로운 겸손의 미학으로 읽힌다.

연곡사의 현대적 정체성은 ‘마음 쉬는 피아골’이라는 이름의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연곡사는 정해진 일정보다 개인의 자율적인 휴식과 성찰을 강조한다. 참가자들은 피아골의 청정한 자연 속에서 자신만의 속도로 내면의 평온을 되찾도록 권유받는다. 하룻밤의 짧은 휴식부터 일주일, 한 달 살기 등 장기 체류 프로그램까지 마련되어 있어 현대 생활의 스트레스와 번아웃에서 벗어나 깊은 치유를 원하는 이들에게 이상적인 안식처를 제공한다. 잿더미 속에서 여러 번 다시 피어난 사찰은, 이제 그 자신이 마침내 얻은 평화와 위안을 세상과 나누고 있는 셈이다.


시간과 평온을 가로지르는 여정
연곡사는 깊고 심오한 이중성을 지닌 공간이다. 한편으로는 산, 물, 사람이 모두 붉게 물든다는 ‘삼홍’의 가을 단풍으로 유명한 한국 최고의 비경 피아골에 안긴 고요한 자연 쉼터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통일신라부터 조선에 이르는 국보급 예술품들을 품고 있는 장엄한 야외 박물관이다.

연곡사를 방문하는 것은 단순한 관광을 넘어 시간을 가로지르는 순례와 같다. 이곳에서 우리는 통일신라 예술의 절정을 목격하고, 고려 시대 장인의 깊은 존경심을 느끼며,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의 고통을 이해하고, 이름 없는 의병들의 저항 정신을 기리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그 모든 파괴를 이겨낸 생존과 부활이 가져다주는 심오한 평화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피아골의 바람이 속삭이고 고대의 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일 때, 연곡사로의 여정은 비로소 당신의 마음속에서 완성된다.


여행자를 위한 안내서

● 찾아가는 길
주소: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피아골로 774
자가용: 네비게이션에 ‘연곡사’를 입력하고 지리산 국립공원 피아골 방면으로 진입. 매표소 지나 직전마을 주차장에 주차 후 도보 5분.
대중교통: 구례공영버스터미널에서 피아골 방면 군내버스를 이용, 연곡사 입구 정류장에서 하차한다. 배차 간격이 길어 사전에 시간표 확인 필수.

● 사찰 너머의 즐거움
자연: 연곡사 방문의 백미는 피아골 계곡 탐방이다. 특히 ‘삼홍(三紅)’으로 유명한 가을 단풍철이 절경이다. 직전마을에서 시작해 삼홍소, 표고막터까지 이어지는 트레킹 코스는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다.

문화와 역사: 연곡사의 본사(本寺)인 화엄사를 함께 방문하면 지리산 불교문화의 깊이를 더할 수 있다. 구례읍 오미동의 운조루와 인근의 쌍산재는 고즈넉한 한옥의 정취를 느끼며 쉬어가기 좋은 고택이다.
산의 맛: 지리산 자락에서 자란 토종닭을 숯불에 구워 먹는 산닭구이는 구례의 대표적인 별미다. 피아골 입구에 전문 식당들이 많다.
강의 맛: 섬진강에서 채취한 민물 다슬기(올갱이)를 넣어 끓인 다슬기 수제비나 해장국은 시원하고 깊은 맛이 일품이다. 구례읍내에 유명 식당들이 있다.
기타: 운조루 인근의 한정식집, 구례읍의 특색 있는 로컬 카페 등 지역의 맛과 멋을 즐길 수 있는 공간들이 곳곳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