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봉인 푼 붉은 비경, 화순 적벽 시인의 마지막 안식처이자 실향민의 망향가 서린 곳 수억년 퇴적의 시간, 김삿갓의 애상, 수몰민의 한 켜켜이 쌓인 서사 위로 장엄한 절벽 솟아 박희정 기자 hoahn01@hanmail.net

2025년 10월 16일(목) 14:06

정해진 시간에, 허락된 이들만이 오를 수 있는 버스가 있다. 전남 화순군 이서면 이서커뮤니티센터 앞. 이른 아침부터 모여든 사람들의 얼굴에는 흔한 관광지의 들뜸과는 사뭇 다른, 경건함마저 묻어나는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목적지는 개인이 자유롭게 차를 몰고 들어갈 수 없는 땅. 30년 넘게 상수원보호구역이라는 이름 아래 굳게 닫혀 있던 금단의 문을 통과하는, 일종의 의식을 치르기 위한 출발점이다.

버스는 이내 짙푸른 동복호의 물길을 옆구리에 끼고 구불구불한 비포장도로로 접어들었다. 차창 밖으로 스치는 풍경은 인기척 하나 없이 고요하고 아름답지만, 그 이면에는 광주광역시 100만 시민의 생명을 책임진다는 엄격한 통제의 역사가 강물처럼 흐른다. 이 절경이 30년간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졌던 까닭은 희귀 동식물을 보전하기 위함도, 신성한 자연유산을 지키기 위함도 아니었다. 오직 거대 도시의 식수원을 지키기 위한, 철저히 인간적인 필요 때문이었다. 이 역설적인 배경이야말로 화순 적벽의 신비감을 증폭시키는 근원이다.

얼마나 달렸을까. 굽이치는 길모퉁이를 도는 순간, 승객들 사이에서 나지막한 탄성이 파도처럼 번져나갔다. “아…!” 짙푸른 호수와 초록빛 산의 경계를 가르며, 거대한 붉은 절벽이 압도적인 위용으로 홀연히 나타났다. 30년 만의 ‘감격스러운 상봉’. 이것은 단순한 풍경 감상이 아니라, 봉인되었던 시간과 공간을 마주하는 특별한 경험의 시작이었다.

이토록 눈부신 원시의 자연이 고스란히 보존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현대화 과정에서 고향을 물속에 묻어야 했던 이들의 아픔 위에 세워진 댐 덕분이다. 지금 눈앞의 저 태고의 아름다움은, 한 공동체의 희생이라는 아픈 역사가 빚어낸 우연한 결과물인 셈이다. 이 복잡하고도 애틋한 현실을 깨닫는 순간, 적벽은 단순한 절경을 넘어 깊은 울림을 지닌 서사시(敍事詩)가 된다.


안내된 조우… 망향정에서 쓴 슬픔을 보다
화순 적벽 투어는 자유로운 탐험이 아니다. 잘 짜인 각본에 따라 제한된 시간과 동선으로 움직이는 ‘안내된 조우’에 가깝다. 통제는 때로 갈망을 키우는 법. 버스는 두 개의 핵심 조망 지점에서 잠시 숨을 고를 뿐이지만, 그 제약이 오히려 눈앞의 풍경을 더욱 소중하고 강렬하게 각인시킨다.

첫 번째 정차 지점은 수몰민들의 애환이 서린 망향정(望鄕亭) 근처 전망대다. 이곳에 서면 가까이엔 보산적벽이, 그 너머 멀리로는 화순 적벽의 백미로 꼽히는 노루목적벽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깎아지른 절벽과 고요한 호수, 그를 품은 옹성산의 능선이 빚어내는 조화는 한 폭의 거대한 동양화다. 사람들은 자연의 위대함과 인간사의 애틋함을 동시에 느끼며 셔터를 누르기에 여념이 없다.

두 번째 정차 지점은 호숫가로 더 가까이 다가가 노루목적벽을 올려다보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수면에 잠긴 부분을 제외하고도 50m, 전체 높이 80m를 훌쩍 넘는 절벽의 압도적인 수직미와 기암괴석의 세밀한 질감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절벽 중앙에는 ‘신선이 사는 곳’이라는 뜻의 붉은 글씨 ‘적벽동천(赤壁洞天)’이 아스라이 새겨져 신비감을 더한다.

이 붉은 절벽은 단순한 바위 덩어리가 아니라, 약 8천만 년 전 중생대 백악기의 역사를 품고 있는 거대한 책이다. 무등산권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의 핵심 지질명소인 이곳은 당시 거대한 호수 주변부였다. 오랜 세월 퇴적된 사암, 이암, 화산재가 굳은 응회암 등이 만들어낸 수평의 층리(層理)는 마치 거대한 시루떡을 켜켜이 쌓아놓은 듯 독특한 무늬를 그린다. 바위 표면에 희미하게 남은 사층리(과거 물 흐름의 흔적)나 연흔(물결 자국)은 이곳이 수억 년 전 건조한 기후의 호숫가였음을 증명하는 지질학적 증거다. 절벽에 위태롭게 뿌리내린 소나무들은 강인한 생명력으로 푸르름을 더하며 계절마다 다른 빛깔의 옷으로 갈아입는다.

하나의 절벽, 두 개의 메아리
화순 적벽의 진정한 가치는 눈에 보이는 풍경 너머, 그곳에 깃든 인간의 이야기에 있다. 이 절벽은 서로 다른 두 개의 강력한 서사가 공존하며 깊은 울림을 만들어내는 무대다. 하나는 예술가의 영감과 위안에 대한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공동체의 상실과 그리움에 대한 이야기다.

■ 시인의 마지막 안식처, 김삿갓 이야기

조선 후기, 삿갓 하나에 몸을 의탁한 채 세상을 떠돌던 천재 시인 난고 김병연(金炳淵). 세인들에게 ‘김삿갓’으로 더 알려진 그에게 화순 적벽은 유별난 의미를 지닌 곳이었다. 홍경래의 난 당시 항복한 조부 김익순에 대한 죄책감으로 평생을 방랑하던 그의 지친 발걸음을 멈추게 할 만큼 적벽의 풍광은 매혹적이었다. 생의 말년을 화순에 머물며 적벽을 자주 찾았고, 이 아름다움에 취해 더는 방랑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을 낳는다.

물염적벽이 마주 보이는 언덕의 물염정(勿染亭)에 앉아 그는 고단한 삶을 시로 읊었다. “무등산이 높다더니 소나무가지 아래 있고 적벽강이 깊다더니 모래 위에 흐르는 물이더라.” 그의 또 다른 시 한 구절은 더욱 절절하다.

“귀밑머리 희어짐이 슬프구나 (平生都門客) / 돌아가기도 어렵고 머물기 또한 어려워 (歸心如過翼) / 몇 날을 길가에서 홀로 방황하였던가 (何日路傍徨)”

‘돌아가기도 어렵고 머물기도 어렵다’는 구절은 뿌리 뽑힌 그의 삶의 비애를 담고 있다. 돌아갈 고향도, 편히 머물 곳도 없는 방랑자에게 물염정에서 바라보는 적벽은 유일한 위안이자 마지막 벗이었을 것이다. 그의 흔적은 오늘날에도 물염정 시비와 그가 생을 마감한 동복면 구암마을의 ‘김삿갓 종명지(終焉地)’에 남아, 나그네의 발걸음을 이끈다.

■ 호수에 잠긴 그림자, 수몰민 이야기

김삿갓의 낭만적 비애와는 선명한 대조를 이루며, 적벽에는 공동체의 깊은 슬픔이 서려 있다. 1970년대부터 1985년에 걸쳐 광주 시민의 식수 공급을 위한 동복댐이 건설되면서,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아가던 15개 마을이 물속으로 사라졌다. 수천 명의 주민들은 평생 일궈온 삶의 터전을 뒤로하고 뿔뿔이 흩어져야만 했다. “하루아침에 정든 집, 묏자리까지 다 물에 잠겨부렀어. 돈 몇 푼 쥐여준다고 그 세월이 보상되는가.” 당시를 기억하는 한 어르신의 말에는 여전히 젖은 한이 서려 있었다.

그들의 사무치는 그리움이 응축된 곳이 바로 망향정이다. 수몰민들은 물에 잠긴 고향 땅이 가장 잘 보이는 이곳에 정자를 세우고 실향의 아픔을 달랜다. 오늘날 적벽 투어의 핵심 조망 지점이 된 이곳은, 사실 눈물과 한숨으로 얼룩진 땅인 것이다. 방문객들은 김삿갓을 매료시켰던 바로 그 절경을, 고향을 잃은 이들의 슬픔이 깃든 망향정에서 바라보게 된다. 하나의 풍경 속에 공존하는 이 두 개의 상반된 서사, 즉 안식을 찾은 자의 이야기와 안식처를 빼앗긴 자들의 이야기가 만들어내는 감정적 불협화음이야말로 화순 적벽을 더욱 심오한 장소로 만든다.

<화순 여행 길잡이> 절벽 너머, 별자리처럼 빛나는 여정
화순 적벽이 여정의 화룡점정이라면, 그 주변에는 감동을 더욱 풍성하게 할 보석 같은 명소들이 별자리처럼 흩어져 있다.

# 화순 고인돌 유적지 (유네스코 세계유산)
수천 년 전 선사 시대의 신비를 마주할 수 있는 곳. 대신리, 효산리 일대에 600기에 달하는 고인돌이 거대한 군집을 이루고 있어 그 규모만으로도 경외감을 자아낸다. 거석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테마파크도 함께 있다.

# 운주사 (천불천탑의 신비)
‘천 개의 불상과 천 개의 탑’ 전설을 품은 사찰. 정형화된 불교미술의 틀을 벗어난 투박하고 해학적인 모습의 석불과 석탑들이 계곡 곳곳에 널려 있다. 특히 도선국사가 하룻밤 만에 천불천탑을 세우다 새벽닭이 우는 바람에 미처 일으키지 못했다는 전설의 ‘와불(臥佛)’은 운주사의 상징이다.

# 세량지 (수채화 같은 풍경)
사진 애호가들의 ‘성지’. 특히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봄날 새벽, 연둣빛 새싹과 산벚꽃이 잔잔한 수면에 그대로 투영되어 만들어내는 데칼코마니 풍경은 몽환적 아름다움의 극치다. 가을 단풍 역시 절경을 이룬다.

● 1박 2일 화순 완전 정복 코스
· 1일차: 화순 고인돌 유적지 → 점심(현지 백반) → 운주사 → 저녁(화순읍 돼지갈비) 및 숙박
· 2일차: 화순 적벽 투어(사전예약 필수) → 점심(달맞이흑두부) → 김삿갓 종명지·물염정 → 세량지

● 화순의 맛! 입을 즐겁게 할 미식 기행
· 달맞이흑두부 (흑두부 요리): 검은콩으로 만든 흑두부는 화순의 대표 향토 음식. 흑두부 삼합, 보쌈, 전골 등 고소하고 건강한 맛을 즐길 수 있다. (화순군 도곡면 지강로 542)
· 초원갈비 (돼지갈비): 숯불 향 가득한 수제 돼지갈비로 현지인들의 사랑을 받는 곳. (화순군 화순읍 만연로 63)
· 삼거리식당 (족발, 국밥): 능주면의 작은 식당이지만 부드러운 족발 맛은 내공이 깊다. (화순군 능주면 죽수길 25)

다시, 그려질 풍경
화순 적벽은 지질학적 걸작이자 예술의 무대이며, 역사의 기념비이자 자연의 성소다. 적벽을 찾는다는 것은 이 모든 겹겹의 시간을 통과하는 일이며, 그 장엄한 아름다움이 인간의 서사와 얼마나 깊이 얽혀 있는지를 깨닫는 과정이다.

이제 30년 만에 문을 연 적벽은 또 다른 변화의 기로에 섰다. 화순군은 총 143억 원을 투입해 절벽에 영상을 투사하는 미디어 파사드, 미디어 경관 숲길 등을 조성하는 ‘실감형 관광명소 사업’을 추진 중이다. 수백 년의 역사와 30년의 침묵을 품은 고요한 풍경이 최첨단 기술과 만나 새로운 목소리를 내려는 것이다.

이 새로운 시도는 적벽이 품고 있는 깊고 조용한 영혼과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아니면 자연과 역사가 간직한 본질적인 무언가를 잃게 될까.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시대를 넘어 끊임없이 다시 그려질 화순 적벽의 또 다른 이야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