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와 모험의 숲, 제암산자연휴양림 박희정 기자 hoahn01@hanmail.net

2025년 10월 16일(목) 14:11

전라남도 보성의 깊은 심장부, 해발 807미터 제암산(帝岩山)의 품으로 들어서는 순간 세상의 소음은 옅어지고 짙은 녹음의 교향곡이 영혼을 감싼다. 정상에 마치 천자(天子)의 옥좌처럼 거대한 바위가 솟아 있어 ‘임금바위산’이라 불리는 이곳은, 예부터 나라에 큰 가뭄이 들 때마다 백성들이 올라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던 신령스러운 영산(靈山)이었다. 그 간절한 기도가 서렸던 영산의 기운은 이제 만인을 위한 치유와 휴식의 공간, 보성 제암산자연휴양림으로 다시 태어나 우리를 맞는다.

이곳은 단순히 나무가 빽빽한 여느 숲이 아니다. 그 속에는 놀라운 역설과 조화가 숨 쉬고 있다. 한편에서는 휠체어도, 서툰 걸음의 아이를 태운 유모차도 편안히 숲의 심장부까지 거닐 수 있는 지극한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고 다른 한편에서는 울창한 숲과 저수지 위를 가르며 하늘을 나는 짜릿한 환호성이 메아리친다. 이 고요한 위안과 역동적인 즐거움의 기묘한 공존, 그 완벽한 조화야말로 제암산이 품은 마법의 본질이자 이곳으로의 여정을 잊을 수 없는 경험으로 만드는 이유다. 제암산은 단순한 휴양림을 넘어 온 가족, 모든 세대가 각자의 행복을 발견하고 재충전하는 ‘살아있는 웰니스 박물관’이며, 자연과 인간이 나눌 수 있는 교감의 최대치를 보여주는 생생한 현장이다.

모두를 위한 길, 숲의 너그러운 포옹

제암산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가장 너그러운 얼굴, ‘더늠길’에 주목해야 한다. 총 길이 5.8km. 이 숫자는 단순한 거리를 넘어, 자연이 인간에게 내어줄 수 있는 가장 깊은 배려의 크기를 의미한다. 가파른 산비탈을 따라 뱀처럼 유연하게 이어지지만, 인위적인 계단 하나 없이 완만한 경사로만 설계된 이 무장애(無障礙) 데크로드는 휴양림의 철학을 온몸으로 웅변하는 공간이다. 노약자, 장애인, 어린 아이 할 것 없이 그 어떤 육체적 제약도 이곳에서는 더 이상 숲을 즐기는 데 장벽이 되지 않는다.

수십 미터 높이의 편백나무와 참나무가 하늘을 가려 터널을 이루는 숲 사이를 가로지르는 데크를 걷다 보면, 휠체어 바퀴 구르는 소리마저 경쾌한 자연의 일부가 되는 경이로운 순간을 맞이한다. 코끝을 스치는 진한 피톤치드 향기, 귓가를 간질이는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귐과 서늘한 계곡 바람을 맞으며 숲의 중턱까지 오르는 동안, 방문객은 육체적 한계를 넘어 자연과 온전히 하나 되는 순수한 해방감을 맛본다. 중간중간 마련된 전망대에 서면 발아래로 펼쳐지는 휴양림의 전경과 멀리 득량만 바다가 아스라이 펼쳐지고, 아찔한 출렁다리는 걷는 즐거움에 작은 스릴을 더하는 쉼표 역할을 한다. 더늠길은 단순한 산책로가 아니라 몸과 마음의 상처를 보듬고 스스로 회복할 힘을 길러주는 감동적인 순례길이다.

이러한 치유의 정체성은 휴양림 한편에 고요히 자리한 ‘전남환경성질환예방관리센터’에서 절정을 이룬다. 전국 유일한 전남권역 치유센터인 이곳은 제암산의 청정한 자연을 단순한 배경이 아닌, 적극적인 치유의 매개로 활용한다. 황토와 맥반석등을 이용한 찜질방, 고농도 산소가 머리를 맑게 하는 산소방, 보성의 상징인 녹차를 우려낸 향긋한 녹차탕 등은 도시의 공해와 스트레스에 지친 몸의 독소를 빼내고 원기를 불어넣는다. 자연의 생명력을 통해 심신의 근본적인 건강을 회복하려는 이들에게 제암산은 더할 나위 없는 안식처이자 희망의 증거가 되어준다.


심장을 뛰게 하는 함성, 숲은 거대한 놀이터다

고요하고 명상적인 치유의 숲은 순식간에 온몸의 감각을 깨우는 거대한 놀이터로 변모한다. ‘놀이숲’이라는 별칭이 증명하듯, 제암산의 또 다른 얼굴은 짜릿한 모험과 유쾌한 에너지로 가득하다. 정적인 휴식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에너지를 발산하고, 일상의 권태를 날려버릴 자극을 원하는 이들에게 이곳은 천국과 같다.

그 중심에는 휴양림의 상징이자 가장 인기 있는 시설인 짚라인이 있다. 안전장비를 착용하고 높은 출발대에 서면 발아래 펼쳐지는 아찔한 풍경에 잠시 숨을 고르게 되지만 이내 강철 와이어에 몸을 싣고 바람을 가르는 순간 눈앞에 펼쳐지는 푸른 산과 에메랄드빛 저수지의 풍경에 모든 두려움은 짜릿한 희열로 바뀐다. 마치 한 마리 새가 되어 숲의 바다 위를 비행하는 듯한 이 경험은, 제암산이 선사하는 가장 역동적인 자유의 순간이다.

나무와 나무 사이를 로프와 흔들다리, 그물망으로 연결한 에코어드벤처는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며 성취감을 맛보는 숲속 담력 훈련장이다. 헬멧을 쓰고 진지한 표정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며 마침내 코스를 완주한 아이들의 얼굴에 피어나는 자신감은 그 어떤 교육보다 값진 가르침을 준다. 코스가 난이도별로 구성되어 있어, 누군가에게는 모험심을, 또 누군가에게는 잊고 있던 동심을 되찾아준다.

또한 썰매를 타고 푸른 언덕을 미끄러져 내려오는 곰썰매등 여러 가지 모험시설은 방문객들에게 끊이지 않는 웃음과 특별한 추억을 선사한다. 이처럼 제암산은 고요한 휴식을 넘어, 숲과 역동적으로 교감하며 에너지를 발산하는 동적인 즐거움을 완벽하게 갖춤으로써 ‘모든 세대를 위한 전천후 휴양림’이라는 명성을 완성한다.

비전으로 일군 숲, 지역과 함께 숨 쉬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제암산의 풍요로움은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 이면에는 미래를 내다본 혜안과 과감한 투자의 역사가 자리하고 있다. 1996년 개장 초기 국유림을 임차해 소박하게 시작했던 이곳은 산림휴양에 대한 국민적 관심 증가와 함께 보성군의 확고한 비전 아래 극적인 변화를 겪었다.

결정적 전환점은 2017년, 10년이 넘는 노력 끝에 보성군이 국유림이던 휴양림 부지를 완전히 군 소유로 이전시킨 것이다. 이는 단순히 행정적 절차의 마무리가 아니었다. 매년 지불하던 임대료를 절감하고 완전한 자율 운영권을 확보한 군은 휴양림의 미래를 위한 과감하고 장기적인 투자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미 2009년부터 약 270억 원의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전국 최장 길이의 무장애 데크로드인 더늠길을 조성하고, 낡은 시설을 현대적으로 리모델링했으며, 숲속의 집을 증설하고 유아숲체험원과 다목적 광장을 신설하는 등 대대적인 체질 개선을 단행했다. 이러한 과감한 투자는 제암산을 단순한 휴양 공간에서 전국 유수의 복합 산림휴양 단지로 도약시킨 결정적 원동력이 되었다.

제암산의 성공은 지역사회와의 연대와 상생 속에서 더욱 빛난다. 휴양림 중심부에 자리한 특산품 판매장은 안정적인 판로를 제공하고 소득 증대에 직접적으로 기여한다. 휴양림을 찾은 수많은 관광객들은 자연스럽게 인근 식당과 상점을 이용하며 한때 조용했던 산골 마을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는다. 봄이면 이웃 장흥군과 함께 개최하는 제암산 철쭉제는 행정 구역의 경계를 넘어 상생하는 축제의 성공적인 모델을 보여준다. 이처럼 휴양림은 홀로 빛나는 섬이 아니라, 지역 경제와 문화를 함께 살찌우는 상생의 구심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시간과 평온을 가로지르는 여정

보성 제암산자연휴양림은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깊고 다채로운 매력을 지닌 공간이다. 한편으로는 4월의 벚꽃 터널과 5월의 철쭉 바다, 여름의 시원한 계곡, 가을의 오색 단풍, 겨울의 고요한 설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자연의 가장 순수한 안식처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치유와 모험이라는 두 가지 가치를 남녀노소 누구나 누릴 수 있도록 완벽하게 구현해낸 웰니스 관광의 가장 성공적인 모델이다.

제암산을 방문하는 것은 단순한 여행을 넘어, 나와 내 가족에게 가장 필요한 시간을 선물하는 일과 같다. 누군가는 더늠길의 고요 속에서 세상의 시름을 잊고 깊은 사색에 잠기고, 누군가는 짚라인의 속도감 속에서 삶의 활력을 되찾으며 환호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편백나무 향기 가득한 통나무집에서 사랑하는 이들과 평화로운 하룻밤을 보낸다. 그 모든 다른 색깔의 경험들이 하나의 숲 안에서 조화롭게 어우러질 때, 제암산으로의 여정은 비로소 당신의 마음속에서 잊히지 않을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된다.

여행자를 위한 안내서

주소: 전라남도 보성군 웅치면 대산길 330
자가용은 내비게이션에 ‘제암산자연휴양림’을 입력. 광주, 순천 등 주요 도시에서 1시간 내외 거리. 진입로 마지막 2km 구간은 산악 지형이므로 서행 운전이 필요하다. 주차는 무료.
대중교통으로는 보성버스터미널에서 군내버스를 이용, 제암산자연휴양림로 바로 갈 수 있다.

4월 초순에는 휴양림 입구와 저수지 변에 흐드러지게 피는 벚꽃 터널이 장관이며, 4월 말부터 5월 초까지는 제암산과 인근 일림산 능선을 진분홍빛으로 물들이는 전국 최대 규모의 철쭉 군락과 철쭉제가 열린다.
대한민국 녹차 수도 보성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는 대한다원(보성녹차밭), 득량만 바다를 조망하며 해수 녹차탕을 즐길 수 있는 율포해수녹차센터, 7080 감성의 득량역 추억의 거리, 소설 태백산맥의 주 무대인 벌교읍 등을 함께 둘러보면 보성 여행이 한층 풍성해진다.

휴양림 인근 식당에서 지친 몸을 달래주는 산채비빔밥이나 토종닭 요리를 맛볼 수 있다. 보성읍내에서는 녹차 먹인 돼지 ‘녹돈’ 삼겹살이, 벌교에서는 싱싱한 꼬막 정식이 대표적인 별미다. 휴양림 내 카페 ‘그린다향’의 진한 녹차 아이스크림도 놓치지 말자.

숙박(숲속의 집, 휴양관) 및 야영장 예약은 산림청 통합예약시스템 ‘숲나들e’를 통해 온라인으로만 가능하다. 선착순 예약이라 주말, 성수기는 여행 계획을 서두르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