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양사, 흰 양의 전설이 깃든 산사 정진욱 기자 hoahn01@hanmail.net

2025년 12월 30일(화) 15:57

장성 백양사 대웅전

기차에서 내려 국도를 따라 북하면 쪽으로 접어들면, 백암산 능선이 차창을 천천히 채운다. 가을이면 산등성이마다 붉은 기운이 번지고, 계곡에는 안개가 눌어붙는다. 이 풍경을 껴안고 앉은 절이 백양사다. 천사백 년 전 울렸다는 첫 범종 소리가 아직도 골짜기 어딘가에서 메아리치는 곳이다. 장성군 문화관광과 템플스테이 공식 사이트 등에 따르면, 백양사의 기원은 백제 무왕 33년(서기 632) 여환조사가 창건한 ‘백암사’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정도전의 「백암산정토사교루기」 등을 근거로, 신라 시절 이름 모를 승려가 세운 절이 고려시대 ‘정토사’로 불리며 이어졌다고 전한다. 즉, 백제 설화와 신라 창건설이 공존하는 사찰이다. ‘백양사’라는 이름은 조선 선조 7년(1574) 환양 스님이 낡은 전각을 중창하며 바꾼 것이다. 문화재청 국가유산포털에 따르면 환양은 법화경 독송 중 백학봉 아래 흰 양이 나타난 일을 계기로 사찰의 이름을 바꾸었다. 이때부터 백암산은 백양산으로 불리며, 흰 양은 청정한 불심을 상징하는 존재가 되었다. 해방 이후 이 산사는 한 번 더 전환점을 맞는다. 1947년, 일제강점기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시기에 만암스님이 이곳에 고불총림을 열어 호남 승가 교육의 본산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이자 다섯 총림 중 하나인 고불총림 백양사는 백두대간이 남하해 노령산맥을 이루는 끝자락에 자리한다. 산문 안에는 보물 제864호 ‘소요대사탑’, 제865호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아미타여래설법도’, 명승 제38호 ‘백학봉’, 천연기념물 ‘비자나무 숲’이 겹겹이 둘러 있다. 한 사찰이 곧 하나의 역사서요, 문화유산의 집약체다.

-흰 양과 영천굴, 한 마리의 해탈이 남긴 이야기
백양사 뒤편 산길을 오르면 백학봉 아래 약사암과 영천굴로 이어지는 오솔길이 나온다. 이 고요한 골짜기에서 절의 운명을 바꾼 한 마리 양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조선 선조 때, 환양 선사가 영천굴 근처에서 『법화경』을 설교하던 날이었다. 산허리에서 흰 양 한 마리가 내려와 대중 사이에 섞여 법문을 들었다. 며칠 동안 이어진 법회 내내 양은 자리를 지켰고, 어떤 대목에서는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회향(법회를 마침)을 앞둔 밤, 환양의 꿈에 그 양이 나타나 “죄로 인해 축생의 몸을 받았으나 법문을 듣고 업장이 풀려 다시 천상으로 돌아가게 됐다.”하고 인사한 뒤 사라졌다. 이튿날 새벽, 스님이 대중과 함께 굴 아래를 찾았을 때 양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환양은 이 해탈의 장면을 우연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법명을 ‘양을 부른다’는 뜻의 환양으로 바꾸고, 절도 흰 양의 절, 백양사라 고쳐 불렀다. 한 짐승의 눈물과 죽음이 산사의 이름을 바꿔놓은 것이다. 영천굴에는 탐욕을 경계하는 전설도 남아 있다. 옛날 한 수행자가 이 굴에서 정진할 때 매일 한 사람이 먹을 만큼의 쌀이 샘처럼 솟아났다고 한다. 그는 주어진 만큼만 받으며 지냈지만, 어느 날 손님이 찾아오자 “조금만 더 나오면 좋겠다”는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막대기를 샘 바닥 깊숙이 찔러 넣자 쌀줄기는 곧 끊겼고, 그 뒤로는 쌀 대신 물만 흘러나왔다. 지금도 영천굴 안에서는 맑은 물이 쉼 없이 솟고, 참배객들은 그 물 한 모금에 “욕심 한 번이 기적을 끊는다”는 옛 가르침을 떠올린다. 전란과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전각은 여러 번 불타고 다시 지어졌지만, 이 두 이야기는 골짜기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스님들은 “축생 한 마리도 제도한다.”는 자비와 “욕심을 줄일수록 샘은 오래 흐른다.”는 깨달음을 전하며, 백양사의 설화를 오늘의 수행 규범이자 살아 있는 법문으로 이어가고 있다.

-‘물 위의 가을’과 철학자 셰프, 오늘의 백양사
갈참나무와 단풍나무가 이룬 터널을 지나면 연못과 쌍계루, 뒤편 백학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잔잔한 수면 위에 누각과 단풍, 흰 바위가 겹겹이 비친 풍경은 ‘물 위의 가을’이라 불린다. 단풍이 절정에 오르면 사진가와 가족 여행객이 연못 가장자리를 따라 서서 이 장면을 한 번이라도 더 담으려 한다. 쌍계루를 지나 대웅전 앞마당에 서면 공기는 달라진다. 조선 시대와 일제강점기를 거쳐 중건된 대웅전과 극락보전, 사천왕문이 둘러선 마당에는 총림 특유의 긴장감과 고요가 함께 흐른다. 이 전각들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와 보물로 지정돼 있으며, 백양사는 지금도 조계종 제18교구 본사로서 호남 승가 교육의 중심 역할을 맡고 있다. 더 산 위로 오르면 선방 운문암과 약사암이 모습을 드러낸다. 운문암의 참선은 마음을, 약사암의 약수와 기도는 몸을 돌보는 일이라며, 스님들은 이 길을 하나의 치유 계단이라 설명한다. 오솔길을 올라 약사암 마당에 서면 백양사 경내와 백암산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을 찾는 이들은 산 아래의 붉은 단풍과 산 위의 바람 사이에서, 자신이 어디쯤 서 있는지 조용히 되묻곤 한다.

해질 무렵, 백양사는 삶의 속도를 낮추는 마을이 된다. 템플스테이에 참여한 이들은 휴대전화를 끄고 숲길 걷기 명상과 발우공양, 묵언 수행을 체험한다. 경내 천진암에는 세계 미식계가 ‘철학자 셰프’라 부르는 정관 스님이 머물며, 제철 채소와 곡물로 식사를 짓는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셰프스 테이블’과 해외 언론 보도로 알려진 뒤, 산사의 부엌은 세계 요리사와 미식가들이 찾아오는 배움의 현장이 됐다. 세계가 주목한 산사의 부엌이지만, 이곳에 있는 것은 화려한 코스요리가 아니라 “요리는 수행의 다른 이름”이라는 다짐뿐이다. 한 끼의 밥과 한 번의 호흡에 마음을 다하는 순간, 백양사가 왜 오늘도 남도의 피난처로 남아 있는지 비로소 실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