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을 선비문화의 고장으로 세운 이름, 하서 김인후

장성의 혼을 세운 하서 김인후
세자를 가르친 조선의 큰 스승
절의로 벼슬길 물린 선비의 길

서은선 기자 hoahn01@hanmail.net
2026년 04월 10일(금) 10:55
하서 김인후 선생이 명종 3년(1548년)에 순창 점암촌 백방산 자락에 지은 강학당 훈몽재 전경. [사진=장성군]
장성을 떠올릴 때 먼저 스치는 것은 필암서원의 기와지붕과 고요한 누각, 오래된 유교 문화의 결이다. 그러나 그 풍경의 중심에는 늘 한 사람이 서 있다. 하서 김인후다. 1510년 장성에서 태어난 김인후는 1543년 홍문관박사 겸 세자시강원설서가 돼 훗날 인종이 되는 세자를 가르쳤고, 인종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조정의 부름보다 절의를 택해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과 후학 양성에 힘을 쏟았다. 장성이 선비문화의 고장으로 불리는 까닭은 결국 한 인물의 생애와, 그 인물을 기리는 공간과, 그 정신을 증언하는 기록유산이 한 줄기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서 김인후 초상화. [사진=장성군]

왕세자를 가르친 장성의 선비

김인후의 이름이 장성의 대표 서사로 자리 잡은 까닭은 단지 고향이 장성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조선 전기 문신이자 성리학자로, 어린 시절 김안국에게 『소학』을 배웠고 1531년 사마시에 합격한 뒤 성균관에서 수학했다. 이 시기 이황과 교유하며 학문을 닦았고, 1540년 별시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다. 이듬해에는 사가독서를 할 만큼 학문적 역량을 인정받았다. 한 지방 선비가 중앙의 학문과 정치 중심으로 나아간 이력만으로도 이미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었다.

김인후의 존재가 역사에서 더욱 또렷해지는 지점은 1543년이다. 그는 홍문관박사 겸 세자시강원설서가 돼 세자를 보필하고 가르치는 직임을 맡았다. 흔히 ‘인종의 스승’이라 부르는 말은 여기에서 비롯됐다. 다만 역사적으로 더 정확히 쓰자면 그는 왕위에 오른 인종의 스승이라기보다, 세자 시절의 인종을 가르친 스승이었다. 이 차이는 작아 보여도 중요하다. 김인후의 위상은 막연한 미화가 아니라 실제 관직과 역할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세자와 김인후의 관계는 단순한 관직상의 인연에 그치지 않았다. 세자는 김인후가 숙직하는 방을 찾아가 강론을 들었고, 『주자대전』을 내렸으며, 손수 그린 묵죽도까지 하사했다. 이는 세자가 김인후의 학문과 인품을 얼마나 두텁게 신뢰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장성이 기억하는 김인후는 이름난 유학자에 머물지 않는다. 왕세자를 가르친 교육자이자, 당대가 먼저 알아본 인물이라는 점에서 지역의 문화적 자부심을 떠받치는 상징이 된다.

그의 학문적 위상은 후대로 갈수록 더 무거워졌다. 김인후는 시문에 뛰어나 10여 권의 문집을 남겼고, 후대에는 동국18현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았다. 1796년에는 문묘에 배향돼 국가적 차원의 유학 계보 속에 이름을 올렸다. 장성이 김인후를 지역의 대표 인물로 내세울 수 있는 까닭은 향토 인물이라는 친밀감에만 있지 않다. 조선 유학의 정통 안에서도 공인된 상징성을 함께 갖고 있기 때문이다.

벼슬보다 절의를 택한 삶

김인후의 삶을 더 깊고 단단하게 만드는 것은 출세가 아니라 물러남이다. 1544년 부모 봉양을 이유로 옥과현감으로 나가 있던 그는, 이듬해 세자가 인종으로 즉위했다는 소식을 들으며 사림 정치에 대한 기대를 품었다. 그러나 인종은 1545년 즉위 뒤 9개월도 채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고, 이후 조정은 급격히 반사림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갔다. 김인후는 깊은 슬픔 속에 병을 이유로 관직을 버리고 귀향했으며, 다시는 벼슬길로 나아가지 않았다.

이 대목에서 김인후의 절의는 추상적인 덕목이 아니라 구체적인 선택으로 다가온다. 그는 중앙 정계의 명망을 내려놓고 고향 장성으로 돌아와 백화정을 짓고 제자를 기르며 성리학 연구에 전념했다. 명종 대 조정은 그의 명망을 높이 평가해 여러 차례 불렀지만 그는 응하지 않았다. 당대에는 학술이 있으면서도 물러난 사람으로 이황과 함께 김인후가 거론될 만큼 그의 존재감이 컸다. 벼슬을 마다한 그의 삶은 패배의 흔적이 아니라 원칙의 형식이었다.

김인후를 둘러싼 지역의 기억은 여기서 더 깊어진다. 장성에는 그가 매년 인종의 기일이면 난산에 올라 북녘을 향해 통곡했다는 전승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 이야기는 실록 기사처럼 확정된 역사 사실이라기보다 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충절의 기억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그럼에도 이 전승이 오래 살아남은 까닭은 분명하다. 장성 사람들은 김인후를 단지 학문이 높은 선비로만 기억하지 않고, 끝내 뜻을 굽히지 않은 인물로 기억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인후의 귀향은 단순한 낙향이 아니다. 그것은 시대와 적당히 타협하지 않겠다는 결심이었고, 학문을 권세의 장식물이 아니라 삶의 기준으로 삼겠다는 선언이었다. 장성의 선비문화는 바로 이 지점에서 뿌리를 얻는다. 학문과 절의, 교육과 품격이 서로 떨어지지 않은 채 한 인물의 생애 안에서 결속돼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김인후는 장성의 과거를 설명하는 인물인 동시에, 오늘의 장성을 해석하는 기준점이 된다.

필암서원. [사진=장성군]


필암서원, 한 사람의 정신을 공간으로 세우다

김인후의 삶이 장성의 서사로 굳어진 것은 그를 기리는 기억이 공간으로 세워졌기 때문이다. 필암서원은 1590년 호남 유림이 김인후의 도학을 추모하기 위해 장성읍 기산리에 사우를 창건하면서 시작됐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됐으나 1624년 복원됐고, 1662년에는 ‘필암’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1672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속에서도 훼철되지 않은 서원 가운데 하나로 남았다. 2019년에는 ‘한국의 서원’의 한 곳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포함돼 그 가치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필암서원이 중요한 까닭은 오래된 건물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곳은 김인후 한 사람을 기리는 제향 공간이면서 동시에 배움이 이어지는 교육 공간이었다. 공부하는 곳을 앞에 두고 제향 공간을 뒤에 둔 전학후묘 형식을 충실하게 따랐고, 청절당은 강당으로, 진덕재와 숭의재는 유생들의 거처로 쓰였다. 제사를 위한 공간과 학문을 닦는 공간이 한 자리에서 맞물린다는 사실은 장성의 선비문화가 추모에 머물지 않고 교육으로 이어졌음을 잘 보여준다.

필암서원의 풍경은 그래서 단순한 고건축의 미감으로만 읽히지 않는다. 확연루와 청절당, 장서각과 장판각에 이르기까지 서원의 짜임은 한 사람의 정신을 지역의 공적 기억으로 보존하는 방식이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서원은 선현을 기리는 사당인 동시에 지역의 교육 질서를 세우는 학교였고, 필암서원은 그 본래 기능을 가장 또렷하게 간직한 공간 가운데 하나다. 장성을 찾는 이들이 그곳에서 마주하는 것은 건물의 고색이 아니라 오랜 시간 켜켜이 쌓인 학문의 예법과 지역의 품격이다.

김인후를 중심에 둔 장성의 문화사는 결국 필암서원을 통해 구체적인 모습을 얻는다. 장성이 스스로를 선비문화의 고장이라 말할 수 있는 배경에는 추상적인 수사가 아니라, 실제로 한 인물을 추모하고 그 가르침을 이어가기 위해 세운 교육 공간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는 사실이 놓여 있다. 김인후의 이름이 지역의 정신사로 자리 잡은 것은 바로 이 물리적 지속성 덕분이기도 하다. 한 사람의 학덕이 한 지역의 문화적 좌표로 바뀌는 순간이 필암서원 안에 온전히 보존돼 있다.
필암서원 고문서. [사진=장성군]

기록유산이 증언하는 장성의 품격

필암서원이 특별한 이유는 기억이 건물에만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김인후의 정신과 서원의 운영 역사를 증언하는 방대한 기록유산이 남아 있다. 보물인 필암서원 문적 일괄은 15책 65장으로 전해지며, 유교의 지방 교육 사정과 제도, 당시 유림의 사회·경제 사정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사료로 평가된다. 한 지역의 선비문화를 말로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문서와 장부, 규정과 기록으로 증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는 남다르다.

하서의 학문은 목판으로도 이어져 있다. 장성 필암서원 하서선생문집 목판은 1568년 초각 이후 1686년 재각, 1797년부터 1802년 사이의 삼각에 이르기까지 200여 년 동안 세 차례에 걸쳐 간행된 기록을 품고 있다. 초각본 1판, 재각본 258판, 삼각본 391판 등 모두 650판이 남아 있어 한 문집이 어떻게 세대를 건너 전승됐는지를 한눈에 보여준다. 여기에 하서유묵 목판 일괄까지 더해지며, 김인후의 정신은 글과 서체, 판각과 보관의 질서를 통해 오늘까지 살아남았다.

이 기록유산이 뜻깊은 까닭은 김인후의 학문이 추상적인 명성에 머물지 않았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장판각에는 『하서집』 구본과 신본을 비롯한 수백 판의 판각이 보관돼 있고, 장서각에는 인종이 하사한 묵죽과 『하서집』 등 1300여 권의 책이 소장돼 있다. 필암서원은 김인후를 추모하는 장소일 뿐 아니라 그의 사유와 문장을 실제 자료로 확인할 수 있는 지식의 창고이기도 하다. 장성의 문화적 자산이 무거운 까닭은 풍경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그 아름다움 뒤에 실증 가능한 기록의 두께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김인후의 교육자적 면모는 『백련초해』를 통해서도 읽힌다. 『백련초해』는 초학자에게 한시를 가르치기 위해 칠언고시 가운데 연구 100개를 뽑아 풀이한 한시 입문서로, 김인후의 편찬으로 전해진다. 한문 학습의 문턱을 낮추기 위해 한글 풀이를 덧붙인 이 책은 그의 학문이 높은 경지의 담론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배움의 첫걸음을 돕는 교육의 형식으로 구현됐음을 보여준다. 김인후를 장성의 대표 서사로 세울 때 그를 절의의 상징으로만 말해서는 부족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가르치는 방법까지 고민한 교육자였다.

결국 장성을 선비문화의 고장으로 세운 힘은 한 사람의 명망만이 아니라, 그 명망이 공간과 기록과 교육의 형식으로 이어졌다는 데 있다. 세자를 가르친 학문, 왕의 죽음 앞에서 물러난 절의, 필암서원이라는 교육 공간, 문집과 유묵과 목판으로 남은 기록유산이 한 흐름을 이룰 때 김인후는 비로소 한 지역의 정신사가 된다. 오늘 장성이 스스로의 문화적 품격을 말하려 할 때 가장 먼저 불러내야 할 이름이 하서 김인후인 까닭도 여기에 있다. 장성의 풍경은 그를 통해 깊어지고, 장성의 역사도 그를 통해 한층 단단한 문장으로 다시 읽힌다.
서은선 기자 hoahn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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