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로가 돼 교토의 스승이 된 영광의 선비, 강항

불갑 들녘서 자란 영광 선비
왜란의 포로가 돼 바다를 건너
교토 스승이 된 조선의 강항

정원채 기자 hoahn01@hanmail.net
2026년 04월 20일(월) 11:27
내산서원 앞 강항 상. [사진=문화재청]
전남 영광 불갑면의 들녘은 고요하다. 불갑사로 향하는 길을 조금 벗어나 내산서원 앞에 서면, 바람 소리보다 먼저 떠오르는 것은 한 사람의 운명이다. 1567년 이 땅에서 태어난 수은 강항은 정유재란의 참혹한 파도에 휩쓸려 일본으로 끌려갔다. 그런데 그의 생애는 패전국 포로의 비극에서 멈추지 않는다. 적국의 실상을 조정에 알린 정보 보고자이자, 교토의 지식인들에게 조선의 학문을 전한 사상사의 매개자로 남았다. 영광은 그를 낳은 고향이면서, 동아시아 지성사의 한 갈래가 출발한 자리이기도 하다.

불갑 들녘에서 큰 선비

강항을 이야기할 때 많은 이들은 먼저 일본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의 시작은 분명 영광이다. 강항은 영광 불갑면 금계리 유봉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시문에 뛰어나 이름을 알렸고, 16세에 향시에 합격한 뒤 1588년 진사, 1593년 별시문과 급제를 거쳐 교서관박사와 전적, 공조·형조 좌랑 등을 지냈다. 지역의 한 선비가 조정의 문신으로 성장하는 이 이력은 단순한 입신의 기록이 아니다. 호남의 바닷길과 들길이 맞닿은 변방에서 자란 인물이 나라의 중심으로 들어가고, 다시 전란 속에 고향으로 돌아와 시대의 정면과 맞서는 서막이기 때문이다.

강항의 학문은 지역의 재능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우계 성혼의 문인이었고, 조선 성리학이 깊이를 더해가던 시대의 학통 안에서 성장했다. 그래서 강항을 ‘왜란 때 일본에 끌려간 영광 사람’으로만 부르면 인물의 크기를 반밖에 읽지 못한다. 그는 이미 조선 지식사회가 길러낸 완성된 문신이었고, 전란은 그 문신을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밀어 올렸다. 이 점에서 강항의 영광은 출생지가 아니라 기반이다. 바다를 앞에 둔 지역의 개방성과 호남 유학의 저력이 한 사람 안에서 만났고, 그 만남이 훗날 국경 밖에서 뜻밖의 울림을 낳았다.

영광은 오래전부터 바다와 들판이 서로 밀고 당기며 삶의 결을 만든 곳이다. 칠산바다의 바람은 외부 세계를 향해 열려 있고, 넓은 평야는 사람을 붙들어 세운다. 강항의 삶에도 이 두 감각이 함께 들어 있다. 그는 문장으로 이름을 얻은 선비였지만, 전쟁이 닥치자 책상 뒤에 숨지 않았다. 영광의 역사적 인물 가운데 강항이 특별한 이유는 학문과 실천, 사유와 행동이 한 몸처럼 붙어 있다는 데 있다. 그의 생애를 따라가다 보면, 영광이라는 지역이 단지 출생지가 아니라 한 인물을 빚어낸 사상적 풍토였다는 사실이 또렷해진다.

난리 속, 바다에서 붙잡힌 사람

강항의 운명을 바꾼 해는 1597년이었다. 휴가를 얻어 고향 영광에 내려와 있던 그는 정유재란을 맞았다. 그는 이광정 휘하에서 군량 보급에 힘썼고, 남원이 함락된 뒤에는 김상준과 함께 여러 고을에 격문을 띄워 의병을 모았다. 나라가 무너지는 소리를 들으며 선비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던 것이다. 하지만 전세는 너무 급했다. 강항은 가족을 태운 배를 타고 바닷길로 피하려 했고, 그 길에서 왜선을 만나 포로가 됐다. 선조실록에 실린 그의 상소를 보면, 그는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 가족과 함께 바다로 몸을 던졌으나 물이 얕아 끝내 사로잡혔다. 이 장면은 충절이라는 말보다 먼저 비린 물 냄새와 절망의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실록은 더 비감한 사실도 전한다. 한 배에 오른 가족 가운데 그의 아버지만이 다른 배를 탔기에 동시에 붙잡혀 죽음을 당하는 일은 면했다. 이 기록을 읽고 나면 강항은 추상적인 위인이 아니라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족과 생사를 나눈 사람으로 다가온다. 그는 문신이었지만 난리 속에서는 피란민이었고, 동시에 나라의 형세를 읽어보려 애쓴 관료였다. 강항의 위대함은 처음부터 거창한 영웅성이 아니라, 무너지는 질서 앞에서도 자신이 맡아야 할 몫을 놓지 않았다는 데서 나온다. 영광의 들판에서 자란 한 선비가 역사의 큰 파도에 휩쓸릴 때조차 끝내 판단을 멈추지 않았다는 점, 그것이 이 인물을 오래 붙들게 하는 힘이다.

그래서 강항의 이야기는 전쟁 영웅담보다 더 아프다. 그는 칼을 든 장수가 아니라 붓을 든 문신이었다. 그런데도 난리 한복판에서는 군량을 챙기고, 의병을 모으고, 가족을 지키려 했다. 그의 생애를 따라가다 보면 조선의 선비정신이란 말이 관념으로 들리지 않는다. 그것은 나라가 무너질 때 끝내 자리를 피하지 않으려는 몸가짐이었고, 마지막 순간까지 무엇이든 해보려는 의지였다. 영광의 바다와 들이 품고 있는 강항의 기억은 바로 여기서 입체가 된다. 그는 전쟁에 휩쓸린 희생자이면서, 동시에 끝까지 행동한 사람이었다.

포로의 신분으로 교토를 흔들다

일본으로 끌려간 강항은 이요의 오쓰성을 거쳐 오사카와 교토 후시미성으로 옮겨졌다. 보통 여기서 포로의 삶은 침묵으로 기록되기 쉽다. 하지만 강항은 침묵하지 않았다. 그는 일본의 병력과 지형, 전략을 파악해 ‘적중봉소’를 조선에 보냈고, 그 일부는 선조실록에도 남았다. 적국 한가운데서 조정에 정보를 밀송한 문신, 이것이 강항의 한 얼굴이다. 동시에 그는 일본의 지식인들과 교유하며 조선의 학문과 예제를 설명했다. 이 역설이야말로 강항을 특별하게 만든다. 그는 포로였지만 무력하지 않았고, 갇혀 있었지만 사유의 문을 닫지 않았다.

특히 주목할 인물은 후지와라 세이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강항이 교토 후시미성에서 후지와라 세이카, 아카마쓰 히로미치 등과 교유하며 학문적 영향을 줬고, 후지와라가 조선의 과거 절차와 춘추석전, 공자묘, 상례와 제례, 복제 등을 배워 뒤에 일본 주자학의 개조가 됐다고 정리한다. 학계도 비슷한 맥락에서, 후지와라 세이카가 강항을 만나 조선의 성리학을 깊이 이해했고 이 만남이 일본 유학을 중흥시키는 계기 가운데 하나가 됐다고 본다. 그래서 강항을 두고 ‘일본 성리학의 원조’라고 단정하는 표현은 다소 넓지만, 근세 일본 주자학 형성에 깊은 자취를 남긴 인물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 영광의 한 선비가 교토의 지성사에 흔적을 남겼다는 사실, 바로 이 장면에서 지역사는 곧 동아시아사가 된다.

그의 역할은 말로만 끝나지 않았다. 강항은 일본 억류 중 사서오경의 화훈본 간행에 참여했고, 『곡례전경』, 『소학』, 『근사록』 등 16종을 수록한 『강항휘초』를 남겼다. 이 자료들은 지금도 일본 내각문고에 소장돼 있다. 포로의 신분으로 타국에 머문 조선 선비가 적국의 학문 형성과 텍스트 유통 과정에까지 관여했다는 사실은 놀랍다. 전쟁이 한 인간에게 남긴 상처는 컸지만, 동시에 그 인간이 남긴 문명의 흔적도 결코 작지 않았다. 강항의 일본 체류기는 그래서 수난사에만 머물지 않고 사상 교류사로 확장된다.

강항의 기록은 오늘 읽어도 생생하다. 훗날 묶인 『간양록』은 단순한 포로 체험담이 아니다. 원래 제목은 ‘건거록’이었고, 1656년 간행되면서 제자들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이 책에는 적지에서 임금께 올린 상소인 적중봉소, 일본의 지도를 그린 왜국팔도육십육주도, 포로들에게 보낸 격문, 귀국 뒤 올린 계사, 일본에서의 환란 생활을 적은 섭란사적 등이 담겼다. 한 권의 책 안에 첩보, 견문, 참회, 충정, 문명의 관찰이 함께 들어 있는 셈이다. 강항은 포로의 몸으로 적국을 기록했고, 그 기록은 오늘 우리에게 전쟁 속 인간과 문명의 표정을 동시에 보여준다. 『간양록』이 문화면에서 자꾸 다시 불려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것은 패배의 기록이 아니라, 패배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은 정신의 기록이다.

돌아와 더 깊어진 이름

1600년 강항은 후지와라 세이카와 아카마쓰의 도움을 받아 가족과 함께 귀국했다. 그는 돌아온 뒤 대구교수와 순천교수에 임명됐지만 스스로 죄인이라 여겨 곧 물러났고, 향리에서 독서와 후학 양성에 힘썼다. 벼슬보다 마음의 부채가 더 컸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강항의 생애는 다시 영광으로 되돌아온다. 일본에서 조선의 학문을 전한 인물이 결국 마지막 삶의 자리를 고향에 두고 제자를 길렀다는 사실은, 그의 인생을 더욱 절제되고 깊게 만든다. 그는 돌아와서도 전란의 상처를 과장하지 않았고, 대신 글과 제자로 자신을 남겼다. 제자 윤순거가 훗날 『간양록』의 발문을 쓰고, 강항의 유적을 정성껏 보살핀 것도 그 삶이 남긴 깊이를 짐작하게 한다.

강항의 이름이 영광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그가 영광의 용계사와 내산서원에 제향되고, 일본 효고현의 류노 성주 아카마쓰 기념비에도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정리한다. 피해의 기억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대목이다. 조선의 포로가 적국에서 남긴 학문적 자취가, 세월이 흐른 뒤 양국의 서로 다른 기억 속에 함께 남은 셈이다. 이 대목에서 강항은 지역 인물을 넘어 한일 지성 교류사의 상징적 인물로 다시 읽힌다.

지금 영광 불갑면 쌍운리의 내산서원은 그 삶을 붙들어 두는 장소다. 내산서원은 1635년 용계사라는 이름으로 강항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고, 훗날 훼철됐다가 1974년 현 위치에 복원됐다. 최초의 건립지는 강항의 태생지이자 선영이 있던 금계리 서봉마을이었다. 지금 서원 주변에는 강항의 묘소와 동상이 있고, 강항을 추모하는 제향의 기억이 이어진다. 현장을 찾으면 화려한 장식보다 단정한 기운이 먼저 다가온다. 낮은 산자락과 서원의 마당, 기념비와 사당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는 한 사람의 명성을 떠드는 대신 그 사람의 절의를 조용히 증언하는 쪽에 가깝다.

내산서원을 둘러보는 일은 강항의 생애를 연표처럼 훑는 일이 아니다. 서원 앞마당에 서면 먼저 시간의 층위가 느껴진다. 그의 사후 18년인 1635년 용계사로 출발한 추모 공간이 서원철폐를 겪고도 다시 복원돼 오늘까지 이어졌다는 사실은, 강항을 향한 지역사회의 기억이 일회적 기념이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영광 사람들에게 강항은 과거의 이름이 아니라, 지역의 정신을 증명하는 기준에 가까웠던 셈이다. 그래서 내산서원은 한 선비를 모신 건축물이면서, 지역이 스스로를 기억하는 방식까지 보여주는 장소다.

내산서원의 의미는 건물 자체에만 있지 않다. 이곳에는 『강감회요』 목판이 남아 있다. 이 목판은 모두 642판으로 1702년에 판각된 것으로 보이며, 1999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돼 내산서원에 소장돼 있다. 서원의 장판각에 남은 목판은 강항이 단지 전란기의 인물이 아니라 오랫동안 읽히고 새겨진 저술가였음을 보여준다. 관광의 언어로 말하자면, 이곳은 풍경을 소비하는 장소가 아니라 시간이 켜켜이 쌓인 장소다. 문화기행의 관점에서 강항의 자취는 ‘볼거리’보다 ‘읽을거리’에 가깝다. 여행자는 이곳에서 한 사람의 학문이 어떻게 전쟁을 지나 살아남았는지, 고향은 어떻게 그 이름을 400년 넘게 붙잡아왔는지 묻게 된다.

무엇보다 강항의 가치를 오늘 다시 읽어야 하는 까닭은, 그를 단순한 ‘애국 인물’이나 ‘일본에 학문을 전한 인물’ 가운데 하나로만 가둘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전쟁의 참혹함을 몸으로 겪은 피해자였고, 동시에 적국의 지성인들과 대화하며 자기 문명의 깊이를 증명한 학자였다. 비극과 품격, 절망과 사유가 한 사람 안에서 함께 버틴 드문 사례라는 점에서 강항은 문화면의 소재를 넘어 오래 사유할 만한 인물이다.

강항을 기리는 일은 단지 한 위인을 추모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전쟁이 한 사람을 어디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지, 또 한 사람의 학문이 국경을 넘어 어떻게 다른 문명에 뿌리내릴 수 있는지를 묻는 일이다. 영광에서 강항을 만나는 여행은 그래서 풍경 감상이 아니라 사유의 이동이다. 불갑의 들녘에서 시작된 한 선비의 길은 왜란의 포로선에 실려 교토까지 갔고, 다시 고향의 서원으로 돌아와 오늘의 우리 앞에 선다. 지역의 작은 서원이 동아시아 지성사의 현장으로 읽히는 순간, 영광은 더 이상 변방이 아니다. 강항은 그 사실을 가장 조용하고도 또렷하게 증명한 사람이다.
정원채 기자 hoahn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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