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투표용지 부족, 진상규명 없이 민주주의 회복은 없다
2026년 06월 12일(금) 09:32
투표용지 부족, 진상규명 없이 민주주의 회복은 없다 [그림=이슈광주전남]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실수’라는 말로 덮을 수 없는 민주주의의 파열음이다. 선거는 국가가 국민에게 베푸는 행정 서비스가 아니다. 주권자가 권력을 위임하는 가장 기본적 절차다. 그런데 그 절차의 문 앞에서 유권자가 투표용지를 기다리다 발길을 돌렸다면, 이는 단순한 불편이 아니라 헌법상 선거권의 침해다. 선거관리의 실패는 한 표의 가치를 가볍게 본 국가의 실패이기도 하다. 투표소에 나온 시민에게 국가는 충분한 투표용지를 준비해야 할 의무가 있다. “기다리면 된다”거나 “나중에 보충했다”는 말은 행정 편의의 언어일 뿐, 권리 보장의 언어가 아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이번 사태가 공직선거법상 재선거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 법률 해석상 선거무효는 ‘결과에 영향을 미쳤는가’라는 엄격한 기준을 통과해야 한다는 점도 사실이다. 그러나 선관위가 스스로 법조문 뒤에 숨을 일은 아니다. 투표용지가 왜 부족했는지, 어느 단계에서 수요 예측과 배정이 무너졌는지, 현장 보고는 왜 늦었는지, 투표하지 못한 유권자가 몇 명인지부터 낱낱이 밝혀야 한다. 피해 규모가 작다는 말도 정확한 조사 뒤에야 가능하다. 진상 규명 없는 법리 주장은 책임 회피로 들릴 뿐이다.

정치권도 마찬가지다. 전면 재선거를 외치든, 문제 지역의 부분재선거를 말하든, 출발점은 증거와 법이어야 한다. 선거 절차에 하자가 있고 그 하자가 당락에 영향을 미쳤다면 법원이 전부 또는 일부 무효를 판단할 수 있다. 반대로, 확인되지 않은 의혹만으로 모든 선거를 부정하자고 몰아가면 민주주의를 지키자는 구호가 오히려 민주주의를 허무는 도끼가 된다. ‘부정선거’라는 말은 그 자체로 폭발력이 크다. 그런 만큼 더 엄격한 사실 확인과 책임 있는 언어가 필요하다. 참정권 침해의 분노를 음모론의 연료로 태우는 일은 피해 유권자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선관위의 잘못은 작지 않다. 투표소마다 사전투표율과 선거인 흐름을 반영하지 못한 준비, 부족 상황이 벌어진 뒤의 늑장 보고, 뒤늦게 바뀐 발생 규모 발표는 국민의 신뢰를 스스로 갉아먹었다. 선거관리 기관에 대한 신뢰는 한번 무너지면 회복에 오래 걸린다. 그러므로 진상규명위원회는 면피용 기구가 되어선 안 된다. 투표용지 인쇄·배정 자료, 현장별 부족 시각, 대기자 명단, 투표 포기자 조사, 상급기관 보고 기록을 공개 가능한 범위에서 최대한 공개해야 한다. 외부 인사로 위원회를 꾸렸다는 형식보다 중요한 것은 자료 접근권과 조사 독립성이다. 책임자 문책도 행정적 꼬리 자르기에 그쳐선 안 된다. 구조적 실패였다면 구조를 고쳐야 하고, 직무유기였다면 그에 맞는 책임을 물어야 한다. 선관위 독립성은 무책임의 방패가 아니라 공정성을 지키기 위한 장치다.

동시에 개표소 봉쇄나 근거 없는 음모론 확산도 멈춰야 한다. 선거에 대한 분노는 합당하지만, 투표함 이동과 개표 절차를 물리적으로 막는 행위는 또 다른 유권자의 의사를 볼모로 삼는 일이다. 민주주의는 의혹을 금지하지 않는다. 다만 의혹을 제기하는 길도 법과 절차 안에 있어야 한다. 수사와 소청, 소송, 국정조사를 통해 진실을 밝히는 것이 가장 단단한 길이다. 거리의 분노가 제도적 진실 규명으로 이어질 때만, 이번 사태는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균열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보수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이번 사태의 해법은 하나다. 선관위는 모든 자료를 내놓고, 국회는 정쟁이 아니라 제도 개선에 집중하며, 사법부는 제기되는 쟁송을 신속하고 엄정하게 판단해야 한다. 전면 재선거든 부분재선거든 결론은 구호가 아니라 사실과 법의 문을 통과해야 한다. 국민이 투표소에서 다시는 “용지가 없다”는 말을 듣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이번 참사의 첫 번째 책임이자 민주주의 회복의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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