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더운 여름을 이겨내는 방법, 영광의 복놀이 탁족·모래찜질로 식힌 더위 김예영 기자 hoahn01@hanmail.net |
| 2026년 08월 07일(금) 13: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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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그늘과 바닷바람 속 복놀이
‘삼복지간에는 입술에 붙은 밥알도 무겁다’는 말이 있을 만큼 한여름 농사일은 고됐다. 사람들은 복날이면 잠시 일손을 놓고 산과 물가를 찾았다. 산간계곡에서는 차가운 물에 발을 담그는 탁족으로 더위를 식히고, 나무 그늘에 둘러앉아 과일과 음식을 나눠 먹었다. 해안지방에서는 뜨겁게 달궈진 백사장에 몸을 묻는 모래찜질로 땀을 냈다. 이처럼 먹을거리를 챙겨 자연 속에서 하루를 쉬며 더위를 피하는 풍속을 ‘복놀이’라 불렀다.
산과 바다를 함께 품은 영광의 자연은 옛 복놀이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불갑산의 울창한 숲은 한낮의 뜨거운 볕을 피하기에 좋고, 가마미해수욕장의 넓은 백사장에는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온다. 해안지방에 전해진 모래찜질은 뜨거운 모래 속에서 땀을 낸 뒤 그늘에서 몸을 식히는 복날 피서법이었다. 산그늘과 바닷가에서 몸을 쉬고 음식을 나눠 먹는 하루는 옛사람들이 삼복더위를 견디던 생활의 지혜였다.
복날 하늘을 올려다본 농부들
삼복은 보양식을 챙겨 먹는 날이기 전에 벼가 한창 자라고 농부의 몸이 가장 고단해지는 때였다. 전남 농촌 지역에서는 복날 내리는 비를 ‘농사비’라 부르며 기다렸다. 다른 지역에서는 복날 비를 꺼리기도 했지만, 벼농사가 중심인 전남에서 한여름 비는 마른 논을 적시고 곡식을 살리는 귀한 물이었다. “초복날 소나기는 한 고방의 구슬보다 낫다”는 속담에도 짧은 소나기 한 줄기를 재물보다 귀하게 여긴 농민의 마음이 담겨 있다. “중복물이 안 내리면 말복물이 진다”는 말은 중복에 오지 않은 비가 말복 무렵에는 내린다는 오랜 경험에서 나왔다.
산과 들, 바다를 함께 품은 영광에서도 복날 구름은 농사의 앞날을 가늠하는 신호였다. 영광은 논이 밭보다 넓고 쌀과 보리, 밀, 콩 농사가 발달한 반농반어 지역이었다. 농부들은 복날 하늘에 구름이 모이면 논의 물길을 살피고 빗줄기를 기다렸다. 더위를 식히는 비 한 번이 벼의 생육과 가을 수확을 좌우했기 때문이다. 영광의 복날은 몸을 보하는 날인 동시에 풍년을 바라며 하늘을 올려다보던 농경의 시간이었다.
붉은 복죽과 촌닭 한 마리
팥죽은 동짓날에만 먹는 음식이 아니었다. 옛사람들은 삼복에도 팥죽을 끓여 먹었으며 이를 ‘복죽’이라 불렀다. 뜨거운 죽으로 땀을 내며 더위를 이겨내고, 붉은 팥이 질병과 나쁜 기운을 막아준다고 믿었다. 팥의 붉은색에 액운을 물리치는 힘이 있다고 본 오랜 믿음이 한여름 밥상에도 이어진 것이다. 큰 솥에 끓인 복죽은 가족과 이웃이 함께 나누며 남은 여름의 건강과 평안을 비는 음식이었다.
전남 농촌의 복날 밥상에는 닭백숙도 자주 올랐다. 집에서 기른 닭을 잡아 마늘과 찹쌀을 넣고 큰 솥에 푹 삶은 뒤 가족과 일꾼이 둘러앉아 나눠 먹었다. 논매기와 김매기가 이어지는 삼복에 닭 한 마리는 지친 몸에 기운을 보태는 귀한 음식이었다.
평소 고기를 자주 먹기 어려웠던 시절, 복날에 닭을 잡는 일은 작은 잔치와도 같았다. 고된 농사일을 함께한 사람들에게 귀한 음식을 대접하고 한자리에 모여 잠시 쉬는 날이었다. 영광의 옛 복날 밥상에는 화려한 상차림보다 팥죽과 닭백숙을 가운데 놓고 가족과 이웃이 둘러앉은 소박한 풍경이 먼저 떠오른다. 한 솥의 국물과 밥을 나누는 동안 이웃의 정을 확인하고 마을 공동체의 끈도 한층 깊어졌다. 함께 먹고 쉬며 다시 일어설 힘을 얻는 것이 농촌의 복달임이었다.
민어와 장어로 채운 여름상
서해와 남해의 펄 바닥에 사는 민어는 여름철 살이 오르고 맛이 깊어져 예부터 복더위에 즐겨 먹던 보양 음식이었다. 칠산바다와 가까운 영광에서는 싱싱한 민어를 회로 맛보고, 탕으로 끓여 한 상을 차린다.
민어회는 여름 민어의 맛을 가장 담백하게 즐기는 방법이다. 민어회는 갓 잡은 민어를 도톰하게 썰어 담백하고 부드러운 맛을 살린다. 살뿐 아니라 껍질과 부레도 따로 손질해 곁들이는데, 부위마다 식감이 달라 한 마리의 맛을 고루 즐길 수 있다. 무더위로 입맛을 잃기 쉬운 계절, 담백한 민어회는 영광의 여름 상을 여는 별미다. 무와 두부, 대파, 고추 등을 넣고 푹 끓인 민어탕은 민어의 담백한 맛이 국물에 배어들고 채소의 시원한 맛이 더해져 무더위에 지친 속을 든든하게 채운다.
황토갯벌장어도 영광을 대표하는 여름 보양식이다. 염산면 일대에서는 황토와 갯벌로 만든 노지 양식장에서 민물장어를 길러 ‘황토갯벌장어’라는 이름을 얻었다. 단백질과 불포화지방산, 비타민과 무기질이 풍부한 장어는 체력이 떨어지기 쉬운 한여름에 즐겨 찾는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회와 탕으로 만나는 민어와 노릇하게 구운 장어 한 상에는 칠산바다와 갯벌을 삶의 터전으로 일궈온 영광 사람들의 여름이 담겨 있다.
영광의 복달임은 한 그릇의 보양식에 머물지 않았다. 불갑산 그늘과 가마미해수욕장의 바람을 찾아 몸을 쉬고, 복날 비를 기다리며 가을 수확을 빌었다. 큰 솥에 복죽과 닭백숙을 끓여 가족과 이웃이 나눠 먹고, 칠산바다에서 건진 민어와 갯벌에서 키운 장어로 여름 밥상을 채웠다. 산과 들, 바다가 내어준 먹거리와 쉼터를 함께 나누며 무더위를 견딘 것이다. 영광의 삼복 문화에는 더위를 이기는 음식뿐 아니라 서로의 건강과 풍년을 빌며 계절의 고비를 함께 넘었던 공동체의 삶이 담겨 있다.
김예영 기자 hoahn01@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