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년 전 벌교서 태어난 음악가, 채동선의 ‘고향’

벌교서 태어난 민족음악가
고향에 담아낸 시대의 상처
민요와 조국을 노래한 선율

김예영 기자 hoahn01@hanmail.net
2026년 08월 18일(화) 13:37
채동선 생가. [사진=한국관광공사]
벌교읍 골목을 걷다 보면 한 음악가의 흔적이 길 위에 이어진다. 채동선음악당과 복원된 생가, 음악당 앞에 새겨진 가곡 ‘고향’의 악보가 그 길을 잇는다. 1901년 벌교에서 태어난 채동선은 일본과 독일에서 음악을 공부한 뒤 식민지 조선으로 돌아와 고향과 조국을 선율에 담았다. 올해는 그의 탄생 125주년이자 광복 81주년이다. 지난달 말에는 채동선음악당에서 그의 삶과 음악을 다룬 북콘서트가 열렸고, 관련 소장자료도 보성군에 기증됐다. 생가와 음악당에 남은 흔적을 따라가면 식민지와 광복, 전쟁을 지나온 한 음악가의 삶이 펼쳐진다. 그가 바이올린과 악보에 담았던 고향과 조국의 이야기도 벌교 곳곳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

벌교 소년, 바이올린을 만나다


채동선은 1901년 전남 보성 벌교에서 태어났다.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3·1운동에 참여해 퇴학당한 뒤 일본으로 건너갔고, 1924년 와세다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문학을 공부했지만 그의 삶을 오래 붙잡은 것은 음악이었다. 청년 시절 바이올린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그는 더 깊은 공부를 위해 유럽으로 향했다. 독일 베를린의 슈테른 음악원에서 바이올린과 음악이론을 익힌 뒤 1929년 귀국했다. 이후 독주회와 음악교육 활동을 이어가며 연주자와 작곡가로 이름을 알렸다.

독일에서 익힌 서양음악은 귀국 뒤 그의 연주와 작곡 활동의 바탕이 됐다. 채동선은 정지용의 시에 곡을 붙여 가곡을 만들고, 민요와 국악을 채보하고 편곡하는 작업도 이어갔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진도아리랑’, ‘도라지타령’ 등 민간에서 불리던 노래를 악보로 옮기며 우리 음악을 기록하는 데도 힘을 보탰다. 연주와 작곡에 머물지 않고 민요와 전통음악의 기록까지 활동 영역을 넓힌 것이다. 벌교에서 시작해 일본과 독일을 거쳐 돌아온 그의 음악 활동은 가곡 ‘고향’과 민요 채보, 광복 뒤 ‘조국’과 ‘독립축전곡’ 등으로 이어졌다.

‘고향’에 새겨진 시대의 흔적


채동선을 대표하는 작품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곡은 정지용의 시에 곡을 붙인 가곡 ‘고향’이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로 시작하는 시는 고향에 돌아왔지만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 없는 상실과 그리움을 담고 있다. 채동선은 여기에 서정적인 선율을 입혀 고향을 잃은 사람의 마음을 노래했다. 일제강점기를 살아가던 조선인들에게 ‘고향’은 개인이 떠나온 장소를 넘어 잃어버린 삶과 나라를 떠올리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이 곡에는 분단 이후의 시대상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한국전쟁 이후 정지용의 작품이 오랫동안 금기시되면서 원래 가사로 부르기 어려운 시기가 이어졌다. 같은 선율에 박화목의 ‘망향’, 이은상의 ‘그리워’가 각각 다른 노랫말로 불리기도 했다. 하나의 곡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다른 가사와 제목을 품은 셈이다. 이후 정지용의 작품이 다시 세상에 나오면서 채동선의 선율도 본래의 ‘고향’과 다시 만났다. 벌교에 남아 있는 ‘고향’의 악보에는 채동선의 음악뿐 아니라 일제강점기와 분단을 지나온 한 시대의 흔적도 함께 남아 있다.

민요에 담고 조국을 노래하다


일제강점기 후반 채동선은 민요와 국악을 채보하고 편곡하는 데 힘을 쏟았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진도아리랑’, ‘도라지타령’ 등 민간에서 불리던 노래를 악보에 옮기며 우리 음악을 기록했다. 독일에서 서양음악을 공부하고 돌아온 그는 일제강점기 말 우리 민요와 전통음악을 기록하는 데 힘을 쏟았다. 연주와 작곡에 머물지 않고 사라질 수 있는 우리 소리를 악보로 남기는 일까지 자신의 음악 활동으로 이어갔다.

광복 뒤에는 조국과 독립을 주제로 한 작품을 잇달아 발표했다. ‘조국’, ‘독립축전곡’, ‘한강’을 비롯해 ‘선열추모가’, ‘개천절의 노래’ 등이 이 시기에 나왔다. 고려음악협회와 작곡가 단체를 이끌며 광복 이후 음악계를 다시 세우는 일에도 참여했다. 일제강점기 민요를 악보에 옮기며 우리 소리를 지켰다면, 광복 뒤에는 되찾은 나라와 독립의 기쁨을 작품으로 남겼다. 채동선의 음악에는 그렇게 식민지와 광복이라는 서로 다른 시대가 차례로 새겨졌다.
채동선 [사진=연합뉴스]

벌교에 남은 ‘고향’과 채동선


채동선은 한국전쟁 중 부산으로 피란해 생활하다 1953년 세상을 떠났으며, 마지막 작품으로 ‘무궁화의 노래’를 남겼다. 50여 년의 짧은 생을 마쳤지만 그가 태어난 벌교에는 지금도 그의 삶과 음악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 남아 있다. 생가는 복원됐고, 지난 2007년에는 채동선음악당이 문을 열었다. 음악당 앞에는 그의 대표 가곡 ‘고향’의 악보가 새겨져 있다. 음악당과 생가를 차례로 둘러보면 채동선의 음악이 시작된 벌교의 풍경과 그의 삶을 함께 돌아볼 수 있다.

지난달 31일 채동선음악당에서는 『녹두밭의 채동선』 저자 초청 북콘서트가 열렸다. 저자인 홍정수 전 장로회신학대 교수는 자신이 오랫동안 소장해 온 채동선 관련 자료를 보성군에 기증했다. 기증 자료는 앞으로 채동선의 삶과 작품을 소개하는 전시와 교육, 학술연구 등에 쓰일 예정이다. 생가와 음악당에 이어 관련 기록까지 보태지면서 벌교에는 채동선의 삶과 음악을 되짚을 수 있는 자료와 공간이 함께 남게 됐다.

125년 전 벌교에서 시작된 채동선의 음악은 지금도 고향 곳곳에 남아 있다. 그가 남긴 ‘고향’의 선율을 따라 음악당을 둘러보고 생가로 향하면, 한 음악가의 삶이 벌교의 골목과 풍경 속에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일제강점기에는 우리 민요를 악보에 옮겼고, 광복 뒤에는 ‘조국’과 ‘독립축전곡’을 남겼다. 벌교를 떠나 일본과 독일에서 음악을 배웠지만 그의 노래가 끝내 향한 곳은 고향과 조국이었다. 그가 떠난 뒤 70여 년이 흘렀지만, 벌교에서는 지금도 ‘고향’의 선율을 따라 채동선이라는 음악가를 만날 수 있다.
채동선음악당. [사진=보성군]
김예영 기자 hoahn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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