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연부터 과거시험, 필암서원서 되살아난 선비의 시간 역사토크로 만나는 선비문화 김예영 기자 hoahn01@hanmail.net |
| 2026년 09월 04일(금) 14: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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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 끝서 만나는 배움의 집
필암서원에 들어서면 먼저 단정하고 절제된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서원 앞에는 넓은 들판이 펼쳐지고, 건물들은 남북 축을 따라 차분하게 이어진다. 공부하는 공간을 앞에 두고 제향 공간을 뒤에 배치한 전형적인 ‘전학후묘’ 구조다. 확연루를 지나면 강학의 중심인 청절당이 나타나고, 유생들이 머물며 공부했던 진덕재와 숭의재가 마주한다. 그 안쪽에는 하서 김인후와 그의 제자이자 사위인 양자징의 위패를 모신 우동사가 자리한다.
강당에서는 학문을 익히고 동·서재에서는 공부와 생활을 이어갔으며, 사당에서는 스승의 학문과 정신을 기렸다. 화려한 장식보다 학문과 예를 중시했던 서원의 성격도 곳곳에서 드러난다. 건물과 마당은 서로 넘치지 않게 자리를 잡고, 열린 들판과 어우러져 차분한 분위기를 만든다. 배움과 생활, 제향이 하나의 공간 안에서 이어지도록 짜인 것이 필암서원의 특징이다. 필암서원은 1590년 김인후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으며, 정유재란 때 소실된 뒤 1624년 다시 지어졌다. 1672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고, 지난 2019년에는 다른 8개 서원과 함께 ‘한국의 서원’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이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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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죽도에 담긴 두 사람의 인연
필암서원 안쪽의 경장각에는 하서 김인후와 인종의 인연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김인후는 1543년 세자시강원 설서로 있으면서 당시 세자였던 인종을 가르쳤다. 이때 세자가 스승 김인후에게 하사한 것으로 전해지는 묵죽도는 두 사람의 각별한 관계를 상징하는 유물로 꼽힌다. 인종이 그린 원본은 전하지 않지만, 이를 목판에 새긴 묵죽도 목판본은 현재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필암서원 경장각에는 관련 판각이 보관돼 있으며, 건물에 걸린 ‘경장각’에는 정조가 직접 쓴 편액이 걸려 있다.
김인후의 삶에는 필암서원이 오늘까지 이어가는 선비정신의 뿌리가 담겨 있다. 그는 1540년 문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아갔고 세자를 가르치는 임무도 맡았다. 그러나 1545년 인종이 세상을 떠나고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고향 장성으로 돌아와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썼다. 이후 여러 차례 관직에 임명됐지만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정치적 격변 속에서 관직보다 학문을 택하고 후학을 가르치는 데 힘쓴 그의 행적은 후대에 도학과 절의를 실천한 선비의 삶으로 평가받았다. 필암서원이 오늘날까지 김인후의 학문과 정신을 기리는 공간으로 이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강연과 체험으로 깨어나는 서원
오는 12일 필암서원에서는 세 번째 ‘역사토크 사(史)랑방콘서트’가 열린다. 지난 5월 설민석 강사, 7월 박시백 만화가에 이어 이번에는 강민성 한국사 강사가 무대에 오른다. 오후 1시 패밀리 마술쇼를 시작으로 오후 2시부터 집성관에서 역사토크가 펼쳐진다. 강민성 강사는 서원의 의미와 한국 전통건축, 필암서원의 공간 구성부터 김인후와 인종의 인연, 을사사화와 선비정신까지 필암서원에 얽힌 역사를 풀어낼 예정이다.
서원의 이야기는 다양한 체험으로도 이어진다. 서예와 가훈 쓰기를 비롯해 묵죽도 부채와 청사초롱 만들기, 유생복 체험 등이 마련된다. 김인후와 인종의 인연을 상징하는 묵죽도를 부채에 담아보고, 유생복을 입고 옛 선비들의 모습을 경험할 수 있다. 강연에서 들은 역사와 서원의 문화를 직접 보고 체험하면서 필암서원이 간직해 온 선비문화를 한층 가까이 만나는 자리다. 오래된 문화유산이 오늘의 방문객과 만나 새로운 이야기와 경험으로 이어지는 시간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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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문 앞에 앉은 오늘의 유생들
가을 필암서원의 또 다른 무대는 다음 달 3일 펼쳐진다. ‘2026 문불여장성 과거시험 재현행사’에서는 참가자들이 강독과 한시, 책문 가운데 한 분야를 선택해 시험을 치른다. 강독은 사서삼경 가운데 준비한 대목을 암송하고, 한시는 ‘세계유산 필암서원’을 시제로 칠언율시를 짓는다. 옛 과거의 마지막 단계에서 치르던 책문은 현대식 논술로 재구성해 광주·전남 지역 고등학생들이 주어진 주제에 자신의 생각을 담아 답한다.
필암서원의 과거시험 재현에는 오랜 흐름이 있다. 지난 1996년부터 하서 김인후의 학문과 정신을 기리는 전국 한시백일장이 열렸고, 2010년부터는 한글백일장으로 이어졌다. 올해는 이를 강독·한시·책문의 세 분야로 확대해 과거시험의 모습을 보다 구체적으로 되살린다. 강독과 한시에 참여하고 청소년들은 책문에 도전하면서 세대가 함께 서원의 학문 전통을 경험하는 자리도 만들어진다.
올가을 필암서원은 다시 배움의 공간이 된다. 사(史)랑방콘서트에서는 김인후와 인종, 서원의 역사와 공간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전통문화를 체험하며, 과거시험 재현행사에서는 강독과 한시, 책문을 통해 옛 선비들의 공부와 글쓰기를 직접 경험한다. 어린이와 청소년, 어른이 한자리에 모여 장성이 이어온 학문과 선비문화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만나는 것이다. 수백 년 전 유생들이 학문을 익히고 스승의 뜻을 되새겼던 서원에 오늘의 사람들이 다시 모여 배우고 생각을 나누면서 필암서원의 시간도 현재로 이어진다. 세계유산 필암서원은 오래된 건축과 유물을 간직한 공간을 넘어,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고 다음 세대에 전하는 살아 있는 배움의 공간으로 가을을 맞는다.
김예영 기자 hoahn01@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