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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군 왕인박사유적지는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했다”는 전승으로 알려진 왕인의 기억을 오늘의 풍경 속에 옮겨 놓은 공간이다. 이곳이 들려주는 것은 화려한 사건 하나가 아니라 “글이 건너갔다”는 오래된 이야기, 그 이야기를 믿고 기억해온 시간, 그리고 기억을 현재의 장소로 차분히 정돈해 둔 태도다.
◇문을 지나 정원을 걷다… 유적지는 ‘속도를 바꾸는 공간’
첫인상은 의외로 조용하다. 대형 기념 공간 특유의 과장된 연출 대신, 정돈된 길과 단정한 수목이 먼저 방문객을 맞는다. 이곳에서는 ‘빨리 보고, 빨리 나가는’ 방식이 잘 작동하지 않는다. 담장과 계단, 그리고 문이 반복되는 구조가 자연스레 걸음을 늦춘다. 경계가 많은 공간은 속도를 나누는 데 능숙하고, 유적지의 동선도 그 원리를 따른다. 천천히 들어가게 만들고, 천천히 나가게 만든다.
안쪽으로 갈수록 사당과 기념 시설, 전시관이 ‘왕인’이라는 이름을 하나의 서사로 묶어 보여준다. 다만 그 서사는 감동을 강요하기보다 질문을 남긴다. 왜 우리는 1,600년 전쯤의 학인 이야기를 지금도 되풀이해 말하는가. 지식의 이동, 문자의 전파, 교육의 시작, 외교와 교류의 상징, 지역 정체성의 재구성까지. 왕인의 이름은 여러 의미로 불리며, 그만큼 다양한 해석의 자리를 만든다. 전시관은 익숙한 문장을 통해 큰 줄기를 정리해주지만, 방문객이 얻는 것은 ‘정답’이라기보다 ‘좌표’에 가깝다. 글이 이동했고, 사람도 이동했다는 사실. 그 두 가지만으로도 이곳은 충분히 현재형이 된다.
야외 공간은 계절에 따라 표정이 크게 달라진다. 벚꽃이 피는 시기에는 ‘왕인로’ 자체가 하나의 장면이 된다. 꽃의 터널을 지나 유적지에 닿는 과정이 그대로 서사가 된다. 여름에는 정원의 초록이 깊어지고, 가을에는 낙엽의 질감이 길을 부드럽게 만든다. 겨울은 더 단정하다. 공기가 가벼워지고 소리가 줄어들면, 같은 동선에서도 생각이 더 크게 들린다. “겨울이 오히려 답사 같네.” 이런 감상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이유다. 이곳의 여행은 ‘무엇을 봤는가’보다 ‘어떻게 걸었는가’로 남는다.
◇일본 사서가 만든 왕인, 전승이 덧댄 왕인…‘기록의 계보’를 읽다
왕인박사유적지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확실한 것’과 ‘전해 내려온 것’이 나란히 서 있다는 데 있다. 왕인(王仁)은 흔히 백제의 학인으로 불리며, 일본에 유학 경전과 문자 학습을 전했다는 이야기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유적지를 한 바퀴 돌고 나면, 질문이 더 선명해진다. 왕인은 실제로 어디에, 어떤 방식으로 기록돼 있을까.
일본에서 왕인 이야기는 「고사기」와 「일본서기」에서 모습을 드러낸 뒤, 「속일본기」, 「고금화가집」 등 후대 문헌과 전승을 거치며 살이 붙었다고 정리된다. 초기 서술이 ‘등장’이라면, 이후의 전승은 ‘구체화’에 가깝다. 왕인이 왜국으로 가게 된 배경과 과정, 왜국에서의 활동, 왕인의 조상과 후예에 이르기까지 후대가 덧대어 놓은 세부가 많을수록 서사는 더 단단해진다. 한 인물의 전기가 ‘사실의 묶음’만으로 굳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대개는 여러 시대의 필요가 겹치며 ‘기억의 골격’을 만든다. 왕인의 전승은 그 과정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이 기록의 계보를 따라가면, 일본에서 왕인이 어떤 인물로 자리 잡았는지도 함께 드러난다. 왕인은 유교문화의 전수자로서 태자의 스승이 돼 천황가의 정치적 자문을 맡았다는 평가로 연결되고, 한자를 전해 일본 글자(가나)의 원형을 마련했다는 설명도 덧붙는다. 더 나아가 일본 고유의 시가인 와카의 창시자라는 전승까지 붙으며, 왕인은 ‘문명 도입자’이자 ‘문화 창안자’로 상승한다. 이런 이야기들이 반복될수록 존숭의 방식도 바뀐다. 지배층만의 기념을 넘어 민간 신앙의 영역으로 내려가 왕인을 모시는 신사, 지역 축제 같은 형태로 확장된다. 한 사람의 이름이 ‘기록’에서 시작해 ‘의례’로 번역되는 지점이다.
다만 여행자가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평가가 어느 부분까지 ‘사서의 서술’이고 어느 부분부터 ‘후대의 전승과 해석’인지 분리해 읽는 태도다. 왕인에 관한 이야기는 한 문장으로 단정할수록 얇아지고, 층을 나눠 읽을수록 두꺼워진다. 왕인박사유적지는 바로 그 두꺼움을 체감하게 하는 현장이다. 전시관을 나와 정원을 걷는 순간, 기록은 종이 위에서 내려와 풍경 위에 겹쳐진다.
◇조선 사행록이 다시 불러낸 왕인…한·일 인식이 ‘정리’된 순간
우리나라에서 왕인에 대한 인식은 ‘일본에 유학과 문자를 전한 인물’, ‘한일 교류의 선구자’라는 큰 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우리 쪽 기록에서 왕인 서사가 뚜렷하게 정리되는 과정은 생각보다 늦게 가시화된다. 왕인과 관련된 기록이 본격적으로 확인되는 흐름은 조선시대 이후로 설명되는 경우가 많다. 신숙주가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온 뒤 편찬한 『해동제국기』에서는 ‘왕인’이라는 이름을 직접 들지 않더라도, 백제가 왜에 서적을 전했다는 맥락이 기록되며 교류의 장면이 먼저 놓인다. 같은 흐름이 이익의 「성호사설」, 안정복의 「동사강목」 등에서 반복되며, ‘백제-왜’의 학문·문자 교류는 하나의 역사적 틀로 자리 잡는다.
‘왕인’이라는 이름이 전면에 등장해 더 구체적으로 불리기 시작하는 계기는 사행록(통신사 기록) 계열에서 뚜렷해진다. 남용익의 「부상록」에서 왕인 이름이 거론된 뒤, 통신사 사행원들의 견문록과 기록이 쌓이면서 왕인 이야기는 점차 윤곽을 갖춘다. 여행자의 시선으로 말하면, 이때부터 왕인은 ‘일본 문헌 속 인물’에서 ‘조선 지식인의 기록 속 인물’로 다시 태어난다. 누군가의 타자(他者)가 아니라, 교류의 기억을 설명하는 우리의 언어가 되는 순간이다.
왕인에 관한 기록이 한 단계 더 ‘체계’를 갖추는 시점은 이덕무와 한치윤의 정리 작업에서 강조된다. 이덕무는 「청비록」과 「청령국지」 등에서 왕인을 천자문을 가져가 일본에 문자를 전하고 경전을 가르친 유학의 시조로 평가하는 한편, 인덕천황을 칭송하는 시조를 지은 와카의 ‘아버지’로까지 서술해 왕인 전승을 폭넓게 수용했다. 한치윤 역시 「해동역사」에서 왕인을 일본 유학의 시조로, 아스카 문화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평가하며 관련 유적을 소개해 ‘실존성’의 무게를 더하려 했다. 핵심은 두 사람의 작업이 “한쪽 이야기만”을 옮기지 않았다는 데 있다. 한국과 일본의 자료를 두루 모아 교차시키며 ‘왕인에 대한 인식’을 정리했고, 그 과정에서 양국의 평가는 생각보다 멀리 갈라지지 않았다. 왕인을 ‘교류의 상징’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서로 다른 언어로 반복될 뿐이었다.
이 대목에서 영암군 왕인박사유적지의 의미가 다시 또렷해진다. 이곳은 왕인의 ‘출생지’ 여부를 단정하는 현장이기보다, 왕인을 둘러싼 기록의 흐름이 어떻게 지역의 풍경이 됐는지를 보여주는 장소다. 일본 사서에서 시작해 조선의 사행록과 실학자의 정리로 이어진 ‘기록의 지도’가, 오늘은 월출산 자락의 길과 문과 정원으로 번역돼 있다. 그래서 이 여행은 과거의 정답을 찾는 행위라기보다, 지식의 이동이 어떻게 ‘이야기’가 되고, 그 이야기가 어떻게 ‘장소’가 되는지를 확인하는 답사에 가깝다. 왕인로를 따라 들어와 문을 지나고 정원을 걷는 동안, 독자는 결국 하나의 결론에 닿는다. 기억은 기록을 따라 움직이고, 기록은 마침내 풍경이 된다.
김예영 기자 hoahn01@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