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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 노란 유채꽃이 여는 길
선학동의 봄은 ‘노란 들판+바다’라는 단순한 공식으로 끝나지 않는다. 유채꽃은 가까이서 보면 작은 꽃송이지만, 들판 전체가 피어오르면 바람의 방향까지 풍경이 된다. 유채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원두막에 닿으면 노란 물결 너머로 쪽빛 득량만이 펼쳐진다. 사진가들이 이른 시간부터 자리를 잡는 이유도, 역광과 해무가 겹칠 때 노란색이 유난히 부드럽게 번지는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선학동 유채밭은 30~60분이면 둘러볼 수 있을 만큼 ‘걷기 좋은 규모’로 소개돼 있다.
꽃밭만 보며 지나치기엔 마을의 지형이 흥미롭다. 선학동은 관음봉 산자락에 자리해, 멀리서 보면 학이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오르는 형상처럼 보인다는 설명이 전해진다. 마을 앞에는 ‘학산(공지산)’이 마을을 감싸듯 서 있고, 다락밭과 논이 바다로 이어지는 곡선이 선학동 풍경의 뼈대를 만든다. ‘선학(仙鶴)’이라는 지명도 이 지형에서 비롯된 이미지를 품고 있다.
이 노란 풍경은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선학동은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고, 농사 인력이 줄면서 비어가는 논과 밭이 늘었다. 마을은 보리를 심으려 했지만 정부의 수매가 끊기자 대체 작물로 유채를 파종했고, 그 소문이 퍼지며 상춘객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후 유채밭은 가을이면 메밀밭으로 ‘계절 교대’를 이어 간다. 한 해 두 번 풍경이 바뀌는 방식은 관광지로서의 ‘계절 분산’이기도 했다.
꽃밭 조성에 박차를 가한 계기는 ‘천년학’ 촬영의 기억과도 연결된다. 임권택 감독이 소설 ‘선학동 나그네’를 바탕으로 영화 ‘천년학’을 만들던 무렵, 촬영지를 찾은 일부 여행객의 냉소적인 말이 마을 사람들에게는 부끄러움으로 남았고, 그때부터 주민들이 머리를 맞대 ‘소설 속 풍경’을 현실에서 되살리기로 했다는 현장 증언이 전해진다. “콩 대신 꽃을 심자”는 설득이 집집마다 이어졌고, 경관보전직불제 등을 발판으로 삼으려 했지만 초기에는 규모 요건을 맞추지 못해 지원에서 제외되는 시행착오도 겪었다.
선학동이 ‘꽃마을’로만 불리지 않는 이유는 변화가 공인된 기록으로 남아 있어서다. 2014년 전라남도 경관우수시범마을로 선정됐고, 2015년 농림축산식품부 지정 새뜰마을로 이름을 올렸으며, 2017년에는 ‘장흥9경’에 포함됐다는 내용이 함께 실려 있다. 한때 ‘범죄없는 마을’로 선정된 이력(1994년 전라남도·광주지방검찰청 지정)도 소개된다.
봄의 선학동은 ‘빛’으로 완성된다. 해가 높아지면 노란색은 강해지고 대비가 또렷해지지만, 해가 낮을수록 노란색은 연해지고 바다는 더 깊어진다. 바닷바람이 강한 날에는 꽃대가 한 방향으로 눕고, 바람이 멈춘 순간엔 들판이 잠시 ‘정지 화면’처럼 고요해진다. 같은 장소에서 다른 장면이 나오는 이유다. 이 길이 예능 프로그램 〈동상이몽2〉에서 ‘한 달 살기’ 장면으로 소개됐다는 기록까지 더해지면, 선학동의 봄은 꽃구경을 넘어 ‘머무는 풍경’으로 확장된다.
꽃밭을 즐기는 방식에는 작은 원칙이 있다. 길이 만들어져 있는 이유는 ‘풍경을 지키기 위해서’다. 유채는 꽃이 진 뒤 갈아엎어야 다음 계절을 준비할 수 있고, 메밀도 수확을 앞두고는 밭의 발자국 하나가 손실로 이어진다. 선학동이 “마을을 깨끗하게 가꿔야 한다는 공감대가 이뤄져 있다”는 현장 목소리를 얻기까지, 꽃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공동체의 약속이었다.
선학동을 이해하려면 장흥의 문학 이야기까지 함께 읽어야 한다. 장흥은 “장흥에서 글 자랑하지 말라”는 말로 소개되기도 한다. 이청준을 비롯해 한승원, 송기숙, 이승우 등 현대문학 작가들이 장흥을 무대로 작품을 썼다는 설명은, 꽃밭의 풍경을 ‘이야기의 무대’로 바꾸는 장치가 된다.
■ 가을, 하얀 메밀꽃과 문학의 향
유채가 물러난 자리는 가을이면 메밀꽃이 채운다. 선학동의 메밀꽃은 9월 말 개화를 시작해 10월 중순 무렵 절정을 맞는 것으로 소개돼 왔다. 공지산 자락에 펼쳐진 꽃밭 면적은 20헥타르 남짓으로 전해지는데, 이를 평수로 환산하면 약 6만 평 규모다. 또 다른 마을 소개 자료에서는 마을을 감싸는 다락밭과 논이 30헥타르 규모라고 설명한다.
가을의 선학동은 봄보다 ‘소리’가 앞선다. 바람이 꽃대를 스치며 지나갈 때 들판 전체가 웅성거리는 듯한 마찰음을 내고, 그 소리 끝에서 파도가 부딪히는 바다 소리가 이어진다. 하얀 꽃은 햇빛을 강하게 반사해 맑은 날에는 들판이 밝게 뜨고, 흐린 날에는 톤이 낮아져 차분해진다.
메밀은 ‘꽃’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마을은 주민 소득과 연결하기 위해 계약재배를 시도했고, aT(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가 최저가격 보장과 장려금, 마을발전기금·축제비 지원 등을 약속하며 전환점이 됐다는 현장 증언도 있다. 메밀은 11월 중순 수확하고, 유채 씨앗은 2월에 심어 꽃을 피운 뒤 갈아엎는 방식으로 운영된다고 전해진다. 마을 곳곳에 문학 안내 표지판이 서고, 방문객이 메밀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는 이야기도 이어진다.
가을 풍경은 축제와도 연결된다. ‘선학동 메밀꽃축제’는 10월 중 열리는 것으로 안내돼 왔다.
이곳이 다른 꽃 명소와 갈라지는 지점은 문학과 영화가 풍경 속에 묻어 있다는 점이다. 선학동은 이청준 작가의 소설 ‘선학동 나그네’ 배경으로 알려져 있고, 임권택 감독은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을 찍었다. 마을 동편 재방 둑(갯가 둑)에는 영화 촬영을 위해 꾸민 ‘천년학 세트장’이 남아 있으며, 방앗간 겸 선술집 형태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촬영된 장소로 소개된다. 이후 드라마 〈일지매〉와 〈꽃할배 수사대〉 등도 이곳에서 촬영된 것으로 안내되고, 예능·방송 프로그램 촬영지로도 이름이 함께 거론된다.
선학동을 둘러본 뒤에는 인근 진목마을로 발길을 옮기면 이야기가 이어진다. 진목마을에는 이청준 작가의 단편 〈눈길〉로 알려진 생가가 남아 있고, 집 안에는 사진과 유물이 놓였다고 안내돼 있다.
선학동을 ‘하루 코스’로 묶으면 장흥의 결이 더 또렷해진다. 꽃밭과 세트장, 진목마을까지 둘러본 뒤에는 탐진강변 산책로를 걷거나 정남진 전망대·편백숲 우드랜드로 이어지는 동선이 함께 소개돼 있다. 하루의 마무리는 ‘장흥삼합’으로 알려진 한우·표고버섯·키조개 관자를 함께 굽는 식탁이다. 관광 안내는 장흥 읍내와 정남진장흥토요시장 일대에 관련 식당이 모여 있다고 설명한다.
꽃이 없는 계절에도 선학동의 뼈대는 남는다. 논두렁과 다락밭이 층층이 이어지는 지형, 바다로 열린 시야, 그리고 마을 곳곳의 문학 안내판이 바람을 맞는다. 봄의 유채가 끝나면 밭을 갈아엎고, 가을의 메밀이 지면 수확을 준비하는 시간들이 이어진다. 선학동이 특별한 이유는 꽃이 ‘피는 순간’만이 아니라, 그 순간을 가능하게 하는 ‘준비의 시간’까지 풍경으로 품고 있기 때문이다.
노란 유채와 하얀 메밀이 번갈아 피는 들판은 ‘한철의 이벤트’가 아니라, 마을이 계절을 운영하는 방식이다. 선학동은 봄에 한 번, 가을에 한 번 같은 자리에서 다른 풍경을 보여주며 사람을 다시 부른다. 꽃이 피는 순간만큼이나, 꽃이 질 무렵 다음 계절의 씨앗을 준비하는 시간이 선학동을 지속시킨다. 그래서 선학동은 한 번의 방문으로 끝나기보다, 계절을 달리해 다시 찾고 싶은 ‘두 번 피는 마을’로 남는다.
김예영 기자 hoahn01@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