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의 희생으로 켜는 수도권의 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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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의 희생으로 켜는 수도권의 불빛
에너지 고속도로 명분과 생존권 정면충돌
재생에너지 성지 전남, 송전탑 그늘 직면
수도권 집중이 낳은 지역차별 에너지 잔혹사
  • 입력 : 2026. 02.23(월) 17:22
  • 김예영 기자
28일 전남 나주시 한국전력 본사 앞에서 '송변전선로 반대 광주전남대책위' 300여명이 초고압 송전선로 건설을 철회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사진=전남도]
전력은 현대 산업의 쌀이자 도심의 생명줄이지만, 그 쌀을 나르는 '길'인 송전탑은 지역 공동체를 할퀴는 깊은 흉터가 되고 있다. 풍요로운 햇살과 바람을 머금은 전라남도가 거대한 철탑의 숲으로 변할 위기에 처했다. 지난해 12월 24일 한국전력공사가 호남의 재생에너지를 수도권 산업단지로 수송하기 위한 ‘에너지 고속도로’ 구축 사업을 당초 계획보다 1년 앞당긴 오는 2030년까지 완수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지역 사회의 저항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는 양상이다.
국가 경제 발전과 반도체 클러스터 지원이라는 명분 아래 추진되는 이 사업은 역설적으로 전남 주민들에게 건강권 위협과 재산권 침해라는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수도권의 번영을 위해 지역의 삶터가 송전로의 통로로 전락했다는 ‘에너지 식민지’ 논란은 이제 단순한 민원을 넘어 생존을 건 투쟁으로 번지고 있다. 본지는 급가속 페달을 밟은 에너지 고속도로 사업의 실태와 그 길 위에서 눈물짓는 전남의 현주소를 짚어본다.

■ 풍요의 역설이 불러온 거대한 철탑의 습격

전라남도는 바야흐로 대한민국 에너지 전환의 최전선이다. 전국 발전 허가 물량의 절반 이상인 52%가 호남권에 집중되어 있으며 태양광과 해상풍력 등 재생에너지 잠재력은 독보적이다. 하지만 이 풍요로움은 지역민들에게 축복이 아닌 거대한 철탑의 공포로 다가오고 있다
한국전력공사는 최근 호남의 재생에너지를 수도권으로 실어 나르기 위한 이른바 에너지 고속도로 사업을 대대적으로 발표했다. 당초 2031년으로 예정되었던 주요 송전선로 건설 계획을 1년 앞당겨 2030년까지 내륙과 해저를 아우르는 13개의 전력망을 구축하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전남은 전국적인 에너지 허브로 도약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송전탑 예정지 주민들의 고통 섞인 탄식과 지역 소멸의 위기감이 짙게 깔려 있다.

■ 수도권 전력 공급을 위한 전남의 일방적 헌신

이번 송전망 확충 사업의 본질적 목적은 호남에서 생산된 전력을 수도권 산업단지로 보내는 데 있다. 수도권의 거대 반도체 클러스터와 인구 집중으로 인한 전력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전남의 땅에 거대한 철탑을 세우고 고압선을 깔겠다는 논리다. 주민들이 분노하는 지점은 바로 이 대목이다. 전남 주민들은 본인들이 사용하지도 않을 전기를 위해 평생 일궈온 문전옥답과 삶의 터전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이는 에너지 생산지와 소비지가 철저히 분리된 대한민국 전력 체계의 고질적인 모순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수도권의 화려한 불빛과 첨단 산업의 번영 뒤에는 전남 농어촌 주민들의 일방적인 희생이 담보되어 있다. 에너지 고속도로라는 화려한 수식어는 결국 지역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수도권 중심주의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라는 비판이 거세지는 이유다.
영암군주민이 세종시까지 원정 집회를 벌이고있다. [사진=전남도]

■ 고속도로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주민들의 눈물

한전이 추진하는 13개의 송전망 사업은 신계룡에서 북천안, 광양에서 신장수, 신강진에서 신해남에 이르기까지 호남과 충청의 심장부를 관통한다. 한전의 에너지 고속도로 사업이 계획대로 성사되면 오는 2030년까지 호남권 재생에너지 수용 용량은 올해 21.3GW에서 2030년 46.1GW로 2배 이상 늘어나게 된다. 하지만 현장의 분위기는 싸늘하다 못해 험악하다. 송전선로가 지나는 마을 주민들은 초고압 전류에서 발생하는 전자파가 건강을 위협하고 지가 하락으로 재산권이 침해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특히 전남은 수려한 자연경관을 자산으로 삼는 지역이 많아 거대 철탑의 등장은 관광 자원 훼손과 농작물 피해로 직결된다. 주민들에게 이 전력망은 미래를 잇는 고속도로가 아니라 마을의 공동체를 파괴하고 정주 여건을 악화시키는 거대한 장벽과도 같다.

■ 벼랑 끝에 선 주민들의 조직적 저항과 외침

갈등의 수위가 높아지면서 주민들의 저항도 조직화되고 있다. 지난해 11월 28일 전남 나주의 한전 본사 앞에서는 광주전남대책위원회가 공식 출범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국가를 위한 희생이라는 구시대적 명분을 단호히 거부하며 사업의 전면 중단을 촉구하고 있다. 충남 지역 역시 호남-수도권 송전선로 건설에 반대하는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한전 지사 앞에서 연일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주민들은 한전이 입지 선정 과정에서 실제 거주하는 민초들의 목소리를 배제한 채 탁상행정으로 노선을 결정했다고 성토한다.
이제 갈등은 특정 마을의 문제를 넘어 지역 사회 전체의 시민권 투쟁으로 번지고 있다.

■ 지자체와 의회가 한목소리로 내뿜는 반대 기류

민심의 이반은 지자체와 지방의회의 강력한 대응으로 이어지고 있다. 전남 영광군의회는 최근 송전선로 건설 사업의 전면 백지화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며 한전을 강하게 압박했다. 해남군도 한국전력공사가 추진하는 초고압 송전선로 건설을 반대하는 주민들이 백지화를 요구하며 ‘고압송전탑 반대 해남군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투쟁에 나섰다.
지난해 12월 16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용인 반도체 국가산단 재검토와 초고압 송전탑 건설 반대 전국 행동’ 출범 기자회견이 열렸다. 전남•광주•전북•충남•대전•경기 등 전국 20개 지역 대책위와 100여 개 시민사회•농민단체가 참여했으며, 1000여 명의 주민이 ‘결사 반대’조끼를 입고 모였다.
정철 대책위원장은 ‘송변전선로 반대 광주전남 대책위원회’ 상임대표 자격으로 전국 규모 출범식에서 “제2, 제3의 밀양이 광주•전남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다”고 호소했다. 그는 이어 “지금 전남엔 해남, 장성, 강진, 화순, 영광, 곡성, 광양, 광주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송전선로와 변전소 건설이 추진되고 있다”며 “누가 우리를 이리 만들었나. 어딘지도 잘 모를 수백 km 떨어진 곳의 반도체 공장을 위해 우리 머리 위에 불덩어리를 실어야 하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렇듯 송전탑 문제는 단순히 민원 차원을 넘어 중앙 정부와 지방 자치 단체 간의 권한과 이익이 충돌하는 고도의 정치적 사안으로 격상되고 있다.

■ 전남도의회의 강력한 경고

사태는 지난 9일 전남도의회가 공식적인 목소리를 내면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도의원들은 성명을 통해 정부의 전력망 확충 계획 중 38%가 호남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는 수치를 제시했다. 이들은 이를 두고 전남이 수도권을 위한 에너지 식민지로 전락하고 있다고 강하게 질타했다. 전남에서 생산된 전기가 지역의 발전을 위해 쓰이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송전망을 타고 수도권의 반도체 단지나 대도시로 흘러가는 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도의회는 전력망 확충 사업의 즉각적인 중단과 재검토를 촉구하며 전남 도민들에게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전력 정책의 모순을 지적했다. 이러한 정치권의 가세는 송전탑 문제가 단순히 마을 단위의 민원을 넘어 전남이라는 광역 지자체의 생존권과 자치권의 문제로 격상되었음을 의미하며 정부와 한전을 향한 압박 수위를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전남도의원들 수도권 위한 송전선로 중단하라. [사진=전남도]

■ 반도체 유치전으로 번진 에너지 주권 논쟁

최근 송전탑 갈등은 단순한 건설 반대를 넘어 ‘반도체 공장 유치’라는 거대한 산업 재편론으로 확산되고 있다. 수도권 외 지역에서 생산된 전력을 반도체 산단에 공급하는 과정에서 설치되는 송전선로와 송전탑을 둘러싼 갈등이 이전론으로 확산된 것이다.
전남은 단순한 송전 거부를 넘어, 풍부한 재생에너지를 무기로 첨단 산업 자체를 지역으로 끌어오는 이른바 ‘에너지 주권’ 확보 전략에 집중하고 있다. 김영록 전남지사는 300조 원 규모의 첨단산업 유치 포부를 밝히며, 삼성 등 대기업의 투자를 호남권으로 이끌어오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이는 전력을 생산하는 지역이 첨단 산업의 혜택까지 누려야 한다는 논리다.
특히 대통령이 최근 수도권 집중형 송전망 구축의 한계를 지적하며 “지금처럼 대대적으로 송전탑을 만들어 전력을 공급하는 방안은 안 된다”고 언급한 점은 이러한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반면 용인시는 인력 수급을 이유로 지방 이전론을 ‘비현실적’이라 일축하고 있어 대립은 격화되고 있다. 결국 송전탑 갈등은 전력 공급의 문제를 넘어, 국가 산업의 지도를 어디에 그릴 것인가를 둘러싼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전면전으로 비화하고 있다.

■ 에너지 정의 실현을 위한 상생과 전환의 길

결국 전남 송전탑 문제는 우리 사회에 에너지 정의라는 무거운 숙제를 던지고 있다. 수도권의 풍요를 위해 지역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에너지 식민지’ 구조는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다. 이제는 보상금 몇 푼으로 주민들의 입을 막으려는 미봉책에서 벗어나 근본적인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지역별 차등 전기요금제를 본격 도입해 에너지를 생산하는 지역 주민들이 실질적인 혜택을 누리게 해야 하며, 송전망 하부 부지를 활용한 지역 공동체 수익 사업 등 체감 가능한 상생안이 제시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기술적 경제성을 이유로 배제해왔던 송전로 지중화를 전향적으로 검토하고 주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투명한 입지 선정 절차를 처음부터 다시 설계해야 한다.
에너지 고속도로가 진정한 상생의 길이 되기 위해서는 그 길 위에 놓인 주민들의 삶과 권리를 먼저 존중하는 민주적 합의가 선행되어야만 한다.

호남에너지고속도로사업추진계획 [그래픽=아시아 경제]
김예영 기자 hoahn0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