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고찰 화엄사, 홍매화·들매화로 물들다

구례
천년 고찰 화엄사, 홍매화·들매화로 물들다
구례 산사, 봄의 시작을 알리는 매화 물결
천년 고찰에 가장 먼저 번지는 붉은 숨결
  • 입력 : 2026. 03.03(화) 10:03
  • 정원채 기자
비 갠 뒤 안개 속에서 화엄사 홍매화가 더욱 선명한 빛을 드러내고 있다. [사진=구례군]
전남 구례 지리산 남쪽 자락에 자리한 화엄사에서는 해마다 달력보다 먼저 봄이 열린다. 긴 겨울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시기, 일주문과 각황전을 지나 대웅전으로 이어지는 고즈넉한 산사에 가장 먼저 번지는 것은 홍매화의 붉은 숨결이다. 꽃잎은 작고 단정하지만 빛은 선명하고 강렬하다. 천년의 흔적을 품은 목재 기둥과 단청 사이에 스며들 듯 퍼지는 색감은 오랜 시간과 자연이 함께 만들어낸 장면을 선연하게 드러낸다. 해마다 첫 개화 소식이 전해지면 사진가와 방문객이 몰려들기 시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홍매화는 겨울 끝자락을 밀어내는 힘을 가진 꽃으로 불린다. 찬 기운 속에서도 먼저 피어나 산사에 생동감을 불어넣고, 붉은 빛줄기처럼 계절의 문을 연다. 하루 중 빛의 변화에 따라 꽃빛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도 각기 다르다. 이른 아침엔 안개와 어우러져 은은하고, 낮에는 단청과 대비돼 선명하며, 해 질 무렵에는 붉은 여운이 더욱 깊어진다. 화엄사라는 공간이 갖는 역사적 무게와 자연환경, 그리고 매화의 상징성이 겹쳐지며 그 자체로 완성도 높은 풍경을 만든다.

뒤이어 들매화가 연분홍과 흰빛으로 경내를 채우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정돈한다. 벚꽃처럼 한순간에 터지듯 만개하지 않고, 가지 하나하나에서 조용히 피어나는 방식은 산사의 정적과 잘 어울린다. 그래서 화엄사의 봄은 ‘발견하는 봄’으로 불리곤 한다. 담장 아래 숨어 피어난 작은 꽃송이, 돌계단 끝에서 문득 마주치는 연분홍빛은 화려함 대신 깊은 여운을 남긴다. 이러한 조용한 변화가 반복될 때, 산사는 겨울의 차가움을 벗고 다시 한 해를 준비하는 생명력을 드러낸다.
아침 햇살이 전각 처마와 꽃잎 사이로 스며들며 봄 정취를 한층 더하고 있다 [사진=구례군]

■ 붉은 매화가 여는 산사의 시간, 들매화가 채우는 봄의 깊이

통일신라 시기 창건된 화엄사는 긴 세월 동안 지리산 남쪽 자락을 지켜온 산사이지만, 이곳에서 계절의 첫 장면을 여는 것은 언제나 매화다. 특히 각황전 앞마당에서 가장 먼저 피어나는 홍매화는 목재와 단청의 결이 살아 있는 전각과 맞닿으며 깊고 선명한 색으로 시선을 끈다. 꽃잎은 크지 않지만 존재감은 확실해, 고요한 공간을 밝히는 불씨처럼 사찰의 분위기를 단숨에 바꿔 놓는다. 겨울의 찬 기운을 견디고 피어나는 모습은 세월을 버텨온 산사의 역사를 상징하듯 단단하다.

그 뒤를 잇는 들매화는 붉은빛의 여운을 부드럽게 감싸며 색의 결을 한층 더한다. 연분홍과 흰빛이 뒤섞인 들매화는 전각의 선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한 폭의 수묵화 같은 장면을 만든다. 경내를 걷는 이들은 화려한 폭발이 아니라 ‘발견하는 봄’을 만난다. 담장 너머로 스며드는 향기, 계단 끝에서 만나는 작은 꽃송이, 오래 머무는 시선이 쌓이며 산사의 풍경은 서서히 깊어진다. 매화가 절집과 오랜 인연을 이어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추위를 이겨내고 가장 먼저 피어난다는 상징성은 수행과 인내의 의미와 닿아 있어 예로부터 많은 이들이 매화를 ‘굳건한 마음’의 비유로 사용했다.
사진가들은 새벽 안개가 걷히는 시간부터 역광이 드리우는 해질녘까지 빛이 바뀌는 리듬을 따라 삼각대를 옮기고, 방문객들은 전각 사이를 천천히 거닐며 홍매화의 강렬함과 들매화의 고즈넉함을 번갈아 담는다. 해마다 같은 나무가 같은 자리에 서 있어도, 빛과 기온, 그날의 마음이 다르기에 같은 봄은 없다. 꽃이 피는 순간에 잠시 멈춰 선 시간, 그 찰나들이 모여 화엄사의 한 해를 다시 열어 준다.

■ 콘테스트의 열기, 남겨진 과제와 내년을 향한 준비

화엄사는 지난 27일부터 오는 29일까지 31일간 ‘꽃피는 순간, 꿈이 피어난다’를 주제로 제6회 홍매화·들매화 사진 콘테스트를 연다. 전문가 부문과 휴대폰 부문으로 나뉘며, 올해 촬영한 작품만 출품이 가능하다. 화엄사 홍보기획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콘테스트 기간 방문객은 약 22만 명, 일일 평균 6700명으로 집계됐다. 이 수치는 매화가 단순한 자연 풍경을 넘어 구례를 찾는 동력으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다.

우석 주지스님은 “2021년 시작된 사진 콘테스트가 이제는 지역의 자긍심이 됐다”며 화엄사가 종교 공간을 넘어 자연과 문화를 통한 치유의 공간으로 확장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매화 개화기는 지리산 둘레길, 섬진강변 관광과 자연스럽게 연계되며 지역 경제에 실질적인 활기를 불어넣고, 인근 상가들도 매년 이 시기를 하나의 ‘성수기’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방문객 증가와 함께 과제도 생겼다. 일부 관람객이 포토라인을 넘거나, 홍매화 가지를 훼손하거나, 새벽 예불 시간 고성을 주고받는 사례가 발생했다. 허가 없는 드론 촬영, 쓰레기 투기 등도 문제로 지적됐다. 화엄사 측은 올해 관람 질서와 유산 보호 기준을 더 강화해 “성숙한 관람 문화가 꽃을 더 오래 지키는 길”이라 강조했다.

한편 콘테스트 수상작은 화엄사 달력과 홍보물, 구례군 홍보 콘텐츠에 활용되며, 저작권은 화엄사와 구례군에 귀속된다. 올해는 1~5회 수상작과 추천작을 모아 전시할 예정이며, 새롭게 드론 촬영 부문도 신설된다. 이는 새로운 시각을 확보할 기회가 되지만, 동시에 사찰 특성상 안전과 허가 체계를 명확히 해야 한다는 숙제도 안긴다. 꽃은 잠시 머물지만 지켜낸 풍경은 다음 봄을 더 선명하게 만든다. 지난해의 아쉬움이 올해의 배움으로 이어진다면, 천년 고찰에 번지는 첫 붉은 숨결은 더 오래 기억될 것이다.
정원채 기자 hoahn0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