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첫 자연유산 민속행사··· 고흥 신금마을 ‘마신제’

고흥
전국 첫 자연유산 민속행사··· 고흥 신금마을 ‘마신제’
고흥 외나로도 상록수림서 봉행
말 주신 모시는 섬마을 마신제
섣달 그믐밤 새벽 풍어를 빈다
  • 입력 : 2026. 03.03(화) 11:16
  • 정원채 기자
고흥 외나로도 상록수림이 에메랄드빛 바다를 배경으로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사진=고흥군]
전라남도 고흥군 봉래면 신금마을의 새해는 ‘숲’에서 시작해 ‘바다’로 이어진다. 마을 뒤편 해안 언덕을 감싸는 천연기념물 제362호 외나로도 상록수림 안, 마신당에 불빛이 켜지면 주민들은 말(馬)을 마을의 주신으로 모시고 섣달그믐 밤부터 새벽까지 한 해의 평안과 풍어를 빈다. 자연유산의 보호 공간이 곧 제의의 무대가 된 드문 사례이자, 전국 자연유산 민속행사의 첫 장을 여는 상징성까지 더해지며 ‘보전’과 ‘전승’의 과제를 동시에 던진다.

◇천연기념물 숲, 마을의 제장이 되다


신금마을 마신제의 중심은 마을회관도, 넓은 마당도 아니다. 제례의 출발점은 상록수림 속에 자리한 마신당이다. 주민들은 해마다 그 숲으로 들어가 제단을 차리고 향을 올리며, 바다에서의 무사와 마을의 안녕을 함께 빈다. 숲이 단순한 경관을 넘어 공동체 신앙의 장소로 기능하면서, 자연유산은 ‘보호해야 할 대상’에 머무르지 않고 ‘살아 있는 기억’으로 다시 숨을 쉰다.

외나로도 상록수림은 남해안 해풍을 막아주는 해안 난대림으로, 후박나무와 동백나무 등 상록활엽수들이 군락을 이루며 오랜 세월 섬마을의 바람막이 구실을 해왔다. 주민들에게 이 숲은 생태적 가치 이전에 삶을 지켜온 방풍림이었고, 그래서 신성한 공간으로 존중돼 왔다. 그 숲 한가운데 마신당이 놓이면서, ‘자연’과 ‘신앙’은 분리되지 않은 채 맞물려 전승돼 왔다. 제례가 이어질수록 숲은 공동체의 언어가 되고, 숲이 유지될수록 제례의 무대도 지켜진다. 이 상호의존이 신금마을 마신제의 본질이다.
전통 제복을 갖춰 입은 마을 제관이 제단에 차려진 과일과 제물을 앞에 두고 엄숙하게 마신제를 올리고 있다. [사진=고흥군]
제관이 제단 앞에 엎드려 절을 올리며 신금마을 마신제를 봉행하고 있다. [사진=고흥군]

◇“왜 말인가”… 섬마을의 불안과 소망이 빚은 믿음


신금마을 마신제는 흔한 당산제의 변주가 아니다. 많은 마을신앙에서 당산신은 나무나 바위, 산 같은 자연물로 상징화되지만, 이 마을은 말(馬)을 신의 자리에 세웠다. ‘말을 주신으로 모신다’는 설명은 단순한 특징 소개가 아니라, 이 제례가 형성된 방식 자체를 드러낸다.

섬마을의 삶은 바다와 맞닿아 있다. 어업이 곧 생계였던 시절, 바다의 변덕은 곧 생존의 위기였고, 무사고 조업과 풍어는 개인의 바람을 넘어 공동체 전체의 절박한 과제였다. 신금마을이 말에게 기원을 집중한 이유도 그 집단적 감정과 맞닿아 있다. 말은 역동성과 번성, 보호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고, 바다로 나가는 삶의 불안을 끌어안는 매개가 됐다. 주민들이 비는 것은 특정 개인의 복이 아니라 마을의 평안, 바다 일의 무사, 공동체의 안녕이다. 말은 그 기도의 중심에 놓이며, 제례는 ‘살아남기 위한 다짐’이자 ‘함께 버티기 위한 약속’으로 굳어졌다.

이 믿음을 더 선명하게 만드는 장치가 백마상과 설화다. 병으로 새끼를 잃은 어미 백마의 사연이 꿈과 만남의 이야기로 이어지고, 그 존재가 신성한 상징으로 받아들여지면서 백마상이 세워지고 제의가 이어졌다는 전승이 전해진다. 설화는 문서로 단정할 수 있는 역사 기록과는 결이 다르다. 하지만 민속행사에서 설화는 ‘왜 이 의례를 지키는가’에 대한 공동체의 대답이 돼 왔다. 신금마을은 ‘왜 말인가’라는 물음에 이야기로 답하고, 그 답을 해마다 의례로 되풀이하며 자기 정체성을 확인해 왔다.

◇섣달그믐 밤부터 새벽까지… 의식의 결, 공동체의 힘


마신제의 시간은 경계에 맞춰져 있다. 섣달그믐 밤부터 정월 초하루 새벽까지, 한 해가 넘어가는 순간에 마을은 숲으로 들어간다. 제관은 일정 기간 금기를 지키며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고, 제수 준비도 마을이 함께한다. 제단에 향이 오르고 축문이 낭독되는 동안 주민들은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절을 올리며 한 해의 안녕을 빈다. 상록수림의 어둠 속에서 제단의 불빛이 흔들리는 장면은, 숲과 신앙이 맞닿는 현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다만 전승의 시간과 운영 방식은 시대의 흐름 속에서 조금씩 조정돼 왔다. 어떤 해에는 일정이 간소화되고 표현이 달라지기도 한다. 전통은 ‘고정된 옛날’이 아니라 핵심을 지키며 조정되는 현재진행형이라는 뜻이다. 중요한 건 날짜 표기의 차이보다, 마을이 매년 같은 마음으로 한자리에 모여 ‘무사와 풍요’를 함께 빈다는 사실이다. 그 반복이 전승을 만든다.

의식이 끝나면 음복과 공동 식사가 이어진다. 엄숙함은 곧 화합의 자리로 넘어간다. 주민들은 음식을 나누며 덕담을 건네고, 마을의 안녕을 다시 다짐한다. 농어촌과 섬 지역에 인구 감소와 고령화가 빠르게 스미는 현실에서, 마신제는 주민들이 한자리에 모여 역할을 나누고 경험을 전하는 드문 계기다. 전통은 의식 그 자체보다 준비와 참여의 과정에서 더 단단해진다. 제례가 공동체를 묶는 힘으로 기능한다는 평가는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전국 첫 봉행’의 상징성… 보전과 전승, 둘 다 풀어야 한다


신금마을 마신제는 자연유산과 전통 신앙이 결합한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더구나 한 해 자연유산 민속행사 일정 가운데 가장 먼저 봉행된다는 상징성까지 얹히며 관심이 커졌다. 그러나 상징성이 커질수록 과제도 선명해진다. 보호 대상인 숲 안에서 의례가 이어지는 만큼, 전승은 보전과 따로 설 수 없다.

숲이 지켜져야 마신당이 지켜지고, 마신당이 살아 있어야 숲은 ‘살아 있는 장소’로 남는다. 이 연결 고리는 말로는 쉽지만, 현장에서는 세심한 관리와 합의가 필요하다. 출입 동선과 안전, 시설 정비, 훼손 방지, 주민 참여의 방식이 촘촘히 맞물려야 한다. 외부 관심이 높아질수록 ‘관람’의 시선이 앞서기 쉽지만, 마신제의 본질은 볼거리가 아니라 공동체가 스스로를 지키는 방식이다. 숲을 지키는 일은 제례를 지키는 일과 분리될 수 없고, 제례를 이어가는 일은 숲을 현재형의 생활 공간으로 남기는 일과 이어져 있다.

신금마을 사람들은 바다를 등지고 숲으로 들어가 말 앞에 절한다. 그 행위는 과거의 풍속을 재현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자연유산을 삶의 언어로 다시 번역하고, 공동체의 약속을 새해의 첫 새벽에 다시 확인하는 작업이다. 상록의 그늘 아래에서 이어지는 말(馬) 제례는 그래서 더 낯설고, 동시에 더 오래된 방식으로 오늘을 살아낸다. 숲과 바다 사이, 마신당의 불빛은 한 해의 시작을 밝히는 작은 등불이 아니라, 공동체가 자연과 맺어온 약속을 이어주는 신호다.
정원채 기자 hoahn0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