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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의 고대사를 말할 때 시선은 오랫동안 내륙의 왕도와 중앙 권력에 머물렀다. 그러나 전남 영암군 시종면 들판에 남은 봉분들은 그 익숙한 시선을 서해 쪽으로 돌려 세운다. 지난해 7월 7일 사적으로 지정된 영암 시종 고분군은 영산강 하구와 서해의 바닷길이 만나는 자리에서, 마한의 토착 세력이 외부 세계와 어떻게 만나고 그 문화를 지역의 질서로 바꿔냈는지를 보여주는 핵심 유적이다. 영암의 고대사는 변방의 기록이 아니라 바닷길 위에서 스스로 중심을 만든 지역사의 한 장이었다는 사실을 이 고분군이 분명하게 보여준다.
영암 시종 고분군은 시종면 옥야리와 내동리 일원에 자리한 사적으로, 옥야리 장동 방대형 고분과 내동리 쌍무덤으로 이뤄져 있다. 조성 시기는 5세기 중후엽에서 6세기 초다. 국가유산포털 기본 정보에는 시대가 백제로 표기돼 있지만, 국가유산청은 이 유적을 마한의 전통을 바탕으로 백제·가야·중국·왜의 요소를 받아들여 현지화한 복합 문화유산으로 설명한다. 영암 시종 고분군의 성격은 바로 이 중층성에서 읽힌다. 단순히 어느 한 세력의 흔적으로만 보기보다, 바다를 통해 유입된 다양한 문화를 지역 사회가 스스로 소화하고 재구성한 결과로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바다와 강이 만나는 시종
시종면의 역사적 비중은 지형에서 먼저 드러난다. 이곳은 영산강 본류와 삼포강, 주변 지류를 함께 굽어볼 수 있는 자리다. 서해를 통해 들어온 문물이 처음 닿고, 다시 내륙으로 퍼져 나가던 해양 교통로의 거점이었다. 국가유산청이 시종 일대를 해양 교통로의 거점이자 내륙 확산의 관문으로 설명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들판에 남은 봉분은 고요하지만, 그 배경에는 강과 바다가 엮어 놓은 거대한 이동과 교류의 네트워크가 놓여 있었다. 영암의 시종은 단순한 농경지가 아니라 정보와 물자, 권력이 한 차례 모였다가 다시 퍼져 나가던 길목이었다.
숫자는 이 땅의 위상을 더 또렷하게 보여준다. 국가유산청 사적분과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영암 지역의 고대 고분은 모두 49개소 187기인데, 이 가운데 시종 지역에만 28개소 104기가 집중돼 있다. 특정 면 단위 지역에 이처럼 많은 고분이 모여 있다는 사실은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 무덤의 밀도는 곧 권력의 밀도였고, 권력의 밀도는 다시 사람과 물자가 몰려들던 중심의 흔적이었다. 시종면이 영산강 유역 남부의 핵심 거점으로 읽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봉분은 흙으로 덮인 과거이지만, 그 숫자만으로도 한 지역의 위세와 기능을 말해 주는 기록이 된다.
이번 사적 지정의 의미도 크다. 옥야리 장동 방대형 고분과 내동리 쌍무덤은 지난 1986년 각각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돼 관리돼 왔고, 지난해 7월 7일 국가 사적 지정과 함께 시도기념물 지정은 해제됐다. 흩어져 있던 개별 유적이 ‘영암 시종 고분군’이라는 하나의 이름 아래 묶인 것이다. 이는 단순한 행정상의 변화가 아니다. 점처럼 흩어진 유적을 선으로 잇고, 영암의 고대사를 단편적 흔적이 아니라 영산강 유역 전체의 흐름 속에서 읽게 만든 해석의 전환에 가깝다.
무덤이 보여준 전환의 순간
영암 시종 고분군이 특별한 이유는 크고 오래된 무덤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국가유산청은 이 고분군을 영산강 유역 마한 전통 지역사회의 사회·문화적 변화를 고분의 조성과 축조 기술로 보여 주는 유적으로 규정한다. 특히 영산강 유역의 고총고분은 5세기 중엽 옥야리 장동 방대형 고분에서 시작해 내동리 쌍무덤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보여 준다. 이는 마한 고유의 전통적 옹관묘에서 벗어나 거대한 방대형 분구와 석곽·석실묘 체계로 넘어가는 변화의 현장을 뜻한다. 시종 고분군은 단순한 묘역이 아니라 시대 전환의 단면이다.
이 변화의 핵심은 장례 방식의 변화에만 있지 않다. 외부 세계와의 접촉이 한 지역의 권력 구조와 문화 양식을 어떻게 바꿔 놓았는지가 이 고분군에 응축돼 있다. 흔히 외래 문화의 유입은 중앙의 일방적 확산으로 설명되지만, 영암 시종 고분군은 다른 장면을 보여 준다. 이곳의 토착 세력은 외부 문화를 그대로 베껴 들이지 않았다. 마한의 전통을 바탕에 두고 백제와 가야, 중국과 왜의 요소를 선택적으로 받아들인 뒤 그것을 지역의 언어로 다시 엮어 냈다. 그래서 이 유적은 변방이 중심을 따라간 흔적이 아니라, 지역이 외부 세계를 자기 질서로 번역한 결과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영암의 고대사는 새롭게 읽힌다. 바닷길은 단순히 물건을 실어 나른 통로가 아니었다. 그것은 권력의 양식과 장례의 형식, 나아가 문화의 취향까지 바꿔 놓은 통로였다. 시종의 봉분은 그 변화를 눈으로 확인하게 하는 드문 자료다. 남도의 고대사를 내륙 중심으로만 읽어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장면이 바로 여기에 남아 있다. 시종 고분군은 바다와 만난 마한 사회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확장했는지 보여 주는 현장이라는 점에서, 영암을 남도 고대사의 중요한 축으로 끌어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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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이 드러낸 바다 너머의 세계
무덤 속에서 나온 유물은 이 고분군이 왜 ‘바닷길로 만난 세계’의 현장인지를 가장 선명하게 증명한다. 국가유산청 자료에 따르면 내동리 쌍무덤에서는 당시 이 지역이 백제와 정치·사회적으로 긴밀히 연결돼 있었음을 보여 주는 금동관 세움장식이 확인됐다. 중국 청자잔과 동남아시아산 유리구슬도 함께 출토됐다. 봉분 외곽에서는 원통형 토기와 동물형상 토제품 같은 외래계 유물도 확인됐다. 이 유물의 조합은 놀라울 만큼 넓은 시야를 제공한다. 영암의 고대 사회가 서해 너머의 문물과 이미 긴밀하게 연결돼 있었고, 그 연결이 단순한 접촉을 넘어 권력과 의례의 형식까지 바꿔 놓았다는 사실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특히 금동관 세움장식은 시종 고분군의 상징을 압축한 유물로 읽힌다. 이는 영암의 지배층이 영산강 유역 내부의 토착 권력에 머무르지 않고 백제계 정치 문화와도 깊게 호흡하고 있었음을 드러낸다. 중국 청자잔과 동남아시아산 유리구슬은 시선을 더 멀리 확장한다. 영암은 내륙의 한 고장에 머문 것이 아니라 바다를 통해 더 넓은 세계와 연결된 공간이었다. 시종의 무덤은 땅속에 묻힌 유적이지만, 그 안에는 교역의 흐름과 위세품의 취향, 그리고 국제적 감각이 함께 묻혀 있다. 그렇게 본다면 영암 시종 고분군은 남도 고대사의 한 귀퉁이가 아니라 해양 교류사의 중요한 문장에 가깝다.
이 유물들을 단순한 수입품 목록으로 읽는 데서 멈추면 시종 고분군의 본질은 반쯤만 보인다. 중요한 것은 지역 지배층이 외부 문물을 어떤 방식으로 사용했느냐는 점이다. 금동관 세움장식은 권위의 상징이었고, 청자잔과 유리구슬은 장례 의례 속에서 피장자의 위상과 세계 인식을 드러내는 매개였다. 원통형 토기와 동물형상 토제품은 외래 요소가 지역의 장송 문화 안으로 스며들어 다시 해석된 흔적이다. 외부 세계는 영암으로 흘러들어 왔지만, 영암은 그것을 자기식으로 배열했다. 시종 고분군이 교류의 현장이면서 동시에 창조의 현장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봉분 아래 숨은 설계와 권력
옥야리 장동 방대형 고분은 이 고분군의 구조적 특징을 가장 또렷하게 보여 주는 대표 유적이다. 국립나주문화유산연구소 조사 결과 이 고분은 남북 29.9m, 동서 26.3m, 추정 높이 3.7m 규모의 방대형 분구에 주구가 둘러진 형태로 확인됐다. 분구 중앙에는 석실묘가 놓였고, 가장자리에는 석곽묘 1기와 옹관묘 4기, 목관묘 1기 등 모두 7기의 매장시설이 마련돼 있었다. 하나의 거대한 봉분 안에 복수의 장례 요소가 중층적으로 배치돼 있다는 사실은 이 무덤이 단순한 매장 공간이 아니라 지배 질서를 시각화한 구조물임을 보여 준다.
축조 방식은 더 인상적이다. 국립나주문화유산연구소는 옥야리 장동 방대형 고분에서 회색 점토를 방사상과 동심원상으로 구획한 뒤 이를 나눠 쌓는 분할 성토 방식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이런 방식은 높고 큰 방대형 봉분을 견고하게 쌓기 위한 정교한 기술의 결과로 해석된다. 거대한 봉분이 자연스럽게 솟은 것이 아니라 치밀한 설계와 대규모 노동력, 그리고 이를 통제할 수 있는 지배 체계 위에서 조성됐다는 뜻이다. 죽은 이를 묻는 일은 곧 공동체의 힘을 조직하고 과시하는 정치 행위이기도 했다. 시종의 봉분은 흙무덤이면서 동시에 권력의 문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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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확인된 원통형 토기 또한 중요하다. 국립나주문화유산연구소는 주구에서 다량의 원통형 토기가 확인됐다고 설명한다. 영산강 유역에서 성행한 양식과 외래계 요소가 함께 드러난다는 점에서, 시종 고분군은 단지 규모가 큰 유적이 아니다. 전통과 외래가 맞물리며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는 장면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자료다. 네모난 봉분, 다장 구조의 매장시설, 외래계 유물은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시종의 지배층은 전통을 버리지도, 외래 문화를 그대로 흉내 내지도 않았다. 필요한 것을 취해 자기 질서로 묶어 냈고, 그 결과가 오늘 들판 위에 남은 봉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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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넘어 현재의 문화로
영암 시종 고분군은 이제 보존의 대상에만 머물지 않는다. 시종면의 마한문화공원은 영산강 유역의 고대 옹관고분을 이해하고 이 지역의 독자적인 고대사를 조망하기 위해 조성된 공간이다. 고분탐사관은 발굴 과정과 매장 형태를 모형으로 재현하고, 전시관과 전망대는 유적을 현재의 해설 언어로 풀어낸다. 고대의 무덤이 박제된 과거로 남지 않고 체험과 교육, 전시의 공간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문화유산이 살아 있는 지역 문화로 옮겨가는 방식이 이곳에서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난다.
실제 활용도 이어지고 있다. 영암문화관광재단은 지난해 11월 14일부터 15일까지 마한문화공원 일원에서 마한역사문화제를 열고, 영암이 고대 마한의 중심지였음을 체험형 프로그램으로 알리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는 시종 고분군이 더 이상 연구자들만의 유적이 아니라 주민과 방문객이 함께 읽는 문화 자산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 준다. 중요한 것은 축제 자체보다 유산을 오늘의 언어로 다시 건네는 방식이다. 영암이 이 작업을 꾸준히 이어 간다면 시종 고분군은 ‘1500년 전 무덤’이라는 설명을 넘어, 한 지역이 바다와 만나 자신만의 문명을 빚어 낸 기억의 장소로 더 깊이 자리매김할 수 있다.
영암 시종 고분군은 영암의 오래된 시간을 오늘의 언어로 읽게 하는 유적이다. 과거의 흔적에 머물지 않고, 현재의 영암을 비춰 보는 문화의 거울이 되기 때문이다. 바다를 통해 외부 세계를 받아들이면서도 스스로의 이름을 지켜낸 고대의 영암은 오늘의 지역 사회에도 같은 질문을 던진다. 지역은 세계와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 또 무엇을 받아들여 자기만의 방식으로 새롭게 빚어 낼 것인가. 시종 고분군은 그 질문에 대한 가장 오래된 대답을 품고 있다. 들판 위 봉분을 스치는 바람은 지금도 영암이 한때 바닷길의 중심에서 세계와 만나고 문화를 일군 땅이었다는 사실을 조용히 증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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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은선 기자 hoahn01@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