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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서는 이 성황당을 오래도록 ‘조장군사당’으로 불렀다. 전승은 옥과 출신 조통과 그를 사모한 아왕공주의 비극을 두 목조신상에 포개 놓았다. 한 사람은 『고려사』에 이름이 남은 고려 문신이고, 한 사람은 지역 설화 속 공주다. 그러나 옥과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두 사람은 사랑을 이루지 못한 남녀를 넘어, 고을을 지키는 신이 됐다. 사랑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 한은 사라지지 않았다. 마을은 그 슬픔을 외면하지 않고 제단 위에 올렸다. 옥과 성황당이 오늘 우리에게 말을 거는 힘도 바로 그 지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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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과 골목에 남은 조장군사당
옥과를 여행하는 길은 화려한 관광지의 동선과는 다르다. 대형 안내판과 긴 줄의 방문객을 기대하면 이곳의 결을 놓치기 쉽다. 옥과 성황당은 크기로 압도하는 유산이 아니다. 조용한 골목 안쪽에서 “여기에도 한 고을의 정신사가 있었다”고 낮게 말을 거는 장소에 가깝다. 성황당은 마을의 경계와 안녕을 빌던 제의 공간이었다. 성 밖의 해자처럼, 마을과 바깥 세계 사이의 불안을 달래는 상징적 울타리이기도 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옥과성황당목조신상을 ‘전라남도 곡성군 옥과면 옥과리 성황당에 있는 신상’으로 정의하고, 이칭을 ‘곡성옥과리서낭당목조신상’으로 정리한다. 옥과성황당은 ‘조장군사당’이라고도 불렸고, 원래 위치는 옥과리 서남쪽 동산이었다가 몇 차례 자리를 옮겨 현재는 옥산사 옆에 자리한 것으로 정리돼 있다. 성황당 건물은 단칸 맞배지붕 형식이며, 내부에는 남녀 목조신상 2구와 머리가 떨어져 나간 동자석조상 1구가 안치돼 있다.
여행자의 눈으로 보면 옥과 성황당은 ‘볼거리’보다 ‘읽을거리’가 많은 장소다. 나무로 깎인 두 신상은 세련된 불상도, 궁중 조각도 아니다. 그러나 민간신앙의 조각은 화려한 조형미보다 공동체가 무엇을 두려워했고, 누구를 기억했고, 어떤 마음을 달래려 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성황당 앞에서는 사진 한 장보다 질문 하나가 먼저 떠오른다. 왜 옥과 사람들은 이 목상을 지키고, 또 제사를 이어왔을까.
이 작은 당집의 가치는 바로 그 질문에서 시작된다. 성황당은 한 고을 사람들이 불안을 마주하는 방식, 죽은 이의 한을 풀어주는 방식, 외지의 위험과 내부의 갈등을 다스리는 방식을 품고 있다. 옥과 성황당은 그래서 단순한 유물 보관처가 아니다. 고을 사람들이 오래 붙들고 살아온 감정의 저장고이자, 사라진 옛 현의 기억을 오늘까지 이어주는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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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 속 조통, 전승 속 조장군
이야기의 중심에는 조통(趙通)이 있다. 전승에서는 그를 ‘조장군’으로 부르지만, 정사 속 조통은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다. 『고려사』 열전은 조통의 자를 역락(亦樂)이라 했고, 그가 옥과현 사람이며 경사와 백가서에 두루 통달한 인물이었다고 기록한다. 과거에 급제한 뒤 정언, 고공낭중, 태자문학 등을 지냈고, 금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3년 동안 구류됐으나 그 재주를 아낀 금나라 사람들이 돌려보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훗날 조통은 좌간의대부, 국자감대사성, 한림학사에 이르렀다.
조통이 당대 문인 사회에서 차지한 위상도 작지 않았다. 이인로는 임춘, 오세재 등과 어울려 시와 술을 즐기며 죽림고회를 만들었고, 이인로와 오세재, 임춘, 조통, 황보항, 함순, 이담지 등은 중국의 죽림칠현에 빗대어 강좌칠현 또는 해좌칠현으로 불렸다. 조통은 무신정변 이후 문인들이 겪은 시대의 불안 속에서도 학문과 문장을 통해 이름을 남긴 인물이었다.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이 생긴다. 역사 속 조통은 문신이고 학자였지만, 옥과의 전승은 그를 ‘장군’으로 기억한다. 이것은 단순한 오류라기보다 민간 전승이 인물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문헌 속 인물은 관직과 행적으로 남지만, 마을 속 인물은 수호와 위엄의 이미지로 다시 태어난다. 성황당의 신이 된 조통은 더 이상 개인 조통만이 아니다. 그는 옥과라는 옛 고을이 스스로를 설명해 온 이름, 마을을 지키는 상징, 외부의 불안 앞에서 기대고 싶은 인물로 바뀌었다.
조통의 삶을 돌아보면 옥과 사람들이 그를 성황당의 주인공으로 받아들인 이유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변방의 작은 고을 출신이었지만, 고려 조정에서 문장과 식견으로 이름을 떨쳤다. 금나라에 억류된 일화는 그의 재주와 외교적 역량을 함께 보여준다. 고향 사람들에게 조통은 ‘옥과도 큰 인물을 낳을 수 있다’는 자부심의 근거였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며 그 자부심은 신앙의 옷을 입었다. 문신 조통은 조장군이 됐고, 조장군은 마을을 지키는 신격으로 남았다.
아왕공주, 사랑이 한으로 변한 순간
조통의 이름에 그림자처럼 붙어 있는 인물이 아왕공주다. 이 대목부터는 정사보다 전승의 영역이다. 지역N문화 자료는 전남 곡성군 옥과면 옥과리 서낭당이 ‘조장군사당’으로 불리며, 그곳의 남녀 신상에 조통장군과 아왕공주의 설화가 얽혀 있다고 소개한다. 지역 설화는 고려시대 조통이라는 학자이자 장군이 있었고, 그를 사모한 공주의 마음이 끝내 비극으로 흘러갔다고 전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가 정리한 성황당 유래는 비교적 간명하다. 조통이 고향 옥과로 낙향하자, 평소 그를 사모하던 공주가 옥과까지 찾아왔다. 그러나 조통이 가까이하지 않자 공주는 한을 품고 죽었다. 그 뒤 지역 무당들이 공주를 가엾게 여겨 그 넋을 달래고 한을 풀어주기 위해 조통과 공주의 모습을 나무로 깎아 한자리에 모시고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
이 전승의 핵심은 사랑의 성취가 아니라 사랑 이후의 처리 방식에 있다. 이루지 못한 사랑은 원망으로 남을 수도 있고, 망각 속에 묻힐 수도 있다. 그러나 옥과의 기억은 그 한을 제의로 옮겼다. 비극의 주인공을 배척하지 않고, 오히려 제단 위로 올렸다. 공주의 죽음을 마을이 품고, 조통의 이름과 함께 모셨다. 이것이 옥과 성황당 이야기가 단순한 연애담에 머물지 않는 이유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설화는 종종 사실 여부만 따지면 힘을 잃는다. 그러나 설화가 오래 살아남는 이유는 그것이 공동체의 감정 질서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왕공주의 이야기는 ‘사랑받지 못한 여인의 한’이라는 개인 감정에서 출발하지만, 성황당에 이르면 ‘고을이 달래야 할 넋’으로 바뀐다. 한 사람의 슬픔이 마을의 제의가 되고, 제의가 다시 문화유산이 되는 과정이다.
이야기를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아왕공주는 단순한 비련의 여인이 아니다. 그는 공동체가 두려워한 ‘풀리지 않은 마음’의 상징이다. 민간신앙에서 억울한 죽음, 이루지 못한 소망, 닫히지 않은 원한은 그대로 두면 마을에 해가 될 수 있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노래하고, 빌고, 목상을 깎고, 제사를 올렸다. 성황당의 여신상은 그런 마음의 형상이다. 공주는 죽음으로 끝난 인물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다시 불러 세운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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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조신상, 마을신앙의 얼굴
옥과성황당목조신상은 약 5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남신상 높이를 84㎝, 여신상 높이를 68㎝로 기록하고, 남신상은 무당들이 쓰는 모자와 닮은 관모를 쓰고 있으며 큰 눈썹과 튀어나온 눈 때문에 장승과도 통한다고 설명한다. 허리에는 흉대를 두르고, 중앙에서 묶인 띠가 발등까지 내려온다. 여신상은 고깔 같은 것을 쓰고, 얼굴 표현이 남신상보다 정교하며, 모아 쥔 두 손은 무엇인가를 들고 기원하는 모습으로 정리돼 있다.
국가유산포털은 옥과 성황당 안에 보존된 남녀 한 쌍의 목상이 민간신앙에서 신으로 여기던 대상물이라고 설명한다. 남자상은 조통 장군으로 전하고, 여자상은 장군의 처라는 설과 장군을 사모하다 한을 품고 죽은 공주라는 설이 함께 전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고 정리한다. 이 대목은 옥과 성황당 전승을 읽을 때 중요한 기준이 된다. 조통과 공주의 설화는 지역에서 오래 전해진 이야기지만, 여신상의 정체는 여러 갈래의 전승을 품고 있다.
두 목조신상은 그래서 더 흥미롭다. 남신상의 장승적 인상은 마을 밖의 사악함을 막는 수호신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여신상의 기원하는 두 손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달램과 빎의 몸짓으로 읽힌다. 한 사람은 고을의 경계를 지키는 힘으로, 다른 한 사람은 풀리지 않은 마음을 하늘에 올리는 기도자로 자리한다.
민간신앙 조각은 궁중미술처럼 완성된 균형을 겨루지 않는다. 오히려 투박함 속에서 생생하다. 옥과의 두 목조신상은 신앙의 대상이자 이야기의 매개체다. 누군가에게는 조통과 아왕공주의 모습이고, 누군가에게는 성황신의 신체다. 또 누군가에게는 옛 옥과현의 행정과 제의가 남긴 흔적이다. 하나의 목상이 여러 의미를 품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유산은 문화면 기획기사의 좋은 소재가 된다.
목조신상 아래에 놓인 시간도 만만치 않다. 나무는 돌보다 약하고, 불보다 약하고, 습기와 벌레에도 약하다. 그럼에도 이 목상은 오래 남았다. 오래 남았다는 것은 단지 보존이 잘됐다는 뜻만은 아니다. 누군가가 지켜봤고, 누군가가 옮겼고, 누군가가 잊지 않았다는 뜻이다. 옥과 성황당의 목조신상은 조각품이기 전에 기억의 물건이다. 손으로 깎은 나무가 마을의 두려움과 연민, 자부심과 기원을 함께 받아낸 셈이다.
옛 옥과현의 제사, 20세기까지 이어진 기억
옥과 성황당의 의미는 사랑 전승에만 갇히지 않는다. 이곳은 옛 옥과현의 제의 질서와도 연결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옥과서낭당이 1914년 옥과현이 곡성군에 폐합될 때까지 국행서낭당으로서 현에서 제사를 지냈고, 그 뒤에도 무당들에 의해 제사가 계속됐으나 1930년경부터 중단됐다고 정리한다.
여기서 ‘국행서낭당’이라는 표현은 중요하다. 성황당이 단순히 개인의 소원을 비는 작은 당집에 머물지 않았다는 뜻이다. 옛 고을 단위에서 제사를 지내던 공적 신앙 공간이었다. 조선시대 지방사회에서 성황신앙은 고을의 안녕, 재난 방지, 풍요 기원과 연결됐다. 옥과 성황당은 그런 관청 제의가 민간신앙과 섞이고, 무당의 제의로 이어지고, 다시 지역 문화유산으로 남은 사례다.
옥과라는 지명 자체도 오랜 역사를 품는다. 옥과는 전남 곡성 지역의 옛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과지현이었다가 757년 경덕왕 때 옥과로 고쳐졌다. 고려시대에는 보성군의 임내였고, 1172년 감무를 두었다. 1895년 군이 됐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곡성군에 병합돼 옥과면이 됐다. 곡성군 옥과면 연혁도 1914년 창평군에 속했던 옥산면·수면 등이 통폐합돼 구 옥과군 지역이 곡성군 관할 면이 된 사실을 확인한다.
그러므로 옥과 성황당은 ‘작은 당집’이 아니라 옛 고을의 축소판이다. 행정구역은 바뀌었고, 관청 제의는 사라졌고, 무당들의 제의도 중단됐지만, 신상은 남았다. 목상은 말이 없지만, 그 침묵이야말로 옛 옥과현의 긴 시간을 말해준다. 문화유산은 때로 가장 낮은 목소리로 가장 오래 말한다.
오늘의 옥과는 곡성군의 한 면이지만, 성황당 앞에 서면 한때 이곳이 독립된 현과 군의 이름으로 존재했던 시간이 되살아난다. 행정의 중심이 바뀌고 길의 방향이 달라져도, 사람들의 제의와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성황당은 그 끈질긴 기억의 증거다. 옥과의 역사와 조통의 이름, 아왕공주의 전승, 목조신상의 신앙적 의미가 한데 얽혀 이 작은 공간을 깊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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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로 읽는 옥과 성황당의 가치
문화 여행은 유명한 절집과 산성만 찾아가는 일이 아니다. 한 지역을 깊이 이해하려면, 마을 사람들이 무엇을 신으로 모셨는지 살펴야 한다. 옥과 성황당은 바로 그런 여행의 길목에 있다. 조통의 역사, 아왕공주의 전승, 성황신앙, 옛 옥과현의 제사, 20세기 초 민간 제의의 흔적이 한 장소에서 만난다.
이곳을 소개하는 문장은 감상만으로는 부족하고, 건조한 지정 정보만으로도 부족하다. 두 축을 함께 붙들어야 한다. 하나는 “조통은 정사에 남은 고려 문신”이라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옥과 사람들은 그와 공주의 슬픔을 신앙으로 바꿨다”는 문화적 진실이다. 전자는 문헌의 영역이고, 후자는 전승의 영역이다. 둘이 만날 때 옥과 성황당은 지역 문화의 깊은 장면으로 살아난다.
옥과 성황당을 오늘의 관광 자원으로 읽는 일도 가능하다. 곡성은 섬진강, 기차마을, 장미공원처럼 널리 알려진 관광지를 갖고 있지만, 옥과 성황당은 그와 다른 결의 여행지를 만든다. 조용한 골목, 작은 당집, 두 목조신상, 고려 문인의 이름, 공주의 슬픈 전설은 ‘느리게 읽는 여행’에 어울린다. 지역 문화 콘텐츠로 풀어낼 때도 억지로 화려하게 만들 필요가 없다. 오히려 “사랑의 한이 고을의 신이 됐다”는 한 문장만으로도 충분히 강한 서사를 갖는다.
이 이야기를 오늘의 독자에게 전할 때 필요한 것은 사실과 전승의 경계를 차분히 세우는 일이다. 조통은 『고려사』와 인물 자료에서 확인되는 역사 인물이다. 아왕공주는 지역 설화 속 인물로 전해지며, 공개 사료만으로는 실존 왕녀로 단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바로 그 경계 때문에 옥과 성황당의 이야기는 더 입체적이다. 기록은 조통의 삶을 붙들고, 전승은 공주의 한을 붙든다. 두 갈래의 기억이 만나 옥과 성황당은 사랑과 제의, 역사와 민속, 고을의 자부심과 연민을 함께 품은 문화유산으로 남았다.
성지용 기자 hoahn01@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