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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는 한 사람의 소리꾼과 한 사람의 고수가 긴 이야기를 끌고 가는 예술이다. 노래만 있는 것도 아니고, 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창과 아니리, 발림과 추임새가 한 판 안에서 서로 기대며 이야기를 세운다. 보성소리의 길을 걷는 일도 이와 닮았다. 강산리라는 장소, 박유전이라는 이름, 정응민의 귀향, 제자들의 수련, 해마다 이어지는 축제가 각각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장단 안에서 맞물린다. 보성의 문화 지도를 펼치면 산길과 마을길 사이로 소리의 길이 겹쳐 보이는 까닭이다.
강산리, 지명 위에 앉은 소리
보성 웅치면 강산리에 들어서면 풍경은 먼저 낮아진다. 산은 높다 말하지 않고, 물길은 자기 소리를 크게 내지 않는다. 판소리 강산제를 떠올리면 이 절제된 풍경이 낯설지 않다. 강산제는 슬픔을 날것으로 쏟아내기보다 한 번 걸러낸다. 감정을 밀어붙이지 않고, 사설을 다듬고, 장단 위에 품격을 세운다. 가슴속에 있는 한을 바로 울음으로 풀지 않고, 노래가 견딜 수 있는 만큼만 내어놓는다.
이 소리의 첫 이름 앞에는 박유전이 있다. 조선 후기 명창 박유전은 서편제 계열의 큰 줄기를 세운 인물로 기억된다. 그는 만년에 보성 웅치면 강산리에 머물며 자신의 소리를 다듬었다. 강산제라는 이름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하나는 박유전이 살던 강산리라는 지명에서 비롯됐다는 설명이고, 다른 하나는 흥선대원군이 그의 소리를 두고 ‘네가 강산 제일이다.’라고 칭찬한 데서 나왔다는 평했다는 이야기다. 어느 쪽을 따르더라도 핵심은 같다. 박유전의 소리는 강산리라는 장소를 통과해 이름을 얻었고, 그 이름은 다시 강산리를 판소리의 기억 속에 오래 남겼다.
판소리의 유파를 말할 때 동편제와 서편제는 자주 나란히 놓인다. 동편제가 비교적 씩씩하고 선 굵은 소리로 기억된다면, 서편제는 애절하고 섬세한 결로 설명된다. 강산제는 서편제의 바탕 위에 서 있으면서도 동편제의 꿋꿋함을 함께 품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래서 강산제는 슬프되 흐트러지지 않는다. 애절하되 과장되지 않는다. 심청이 인당수 앞에 설 때도 비극은 통곡에만 머물지 않는다. 소리는 슬픔을 예술의 언어로 들어 올린다.
이 지점에서 강산리는 단순한 행정구역을 넘어선다. 박유전의 소리가 그곳에 머물며 다듬어졌고, 강산리라는 이름은 판소리사의 한 유파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넓어졌다. 지명은 먼저 있었고, 소리는 그 지명에 예술의 깊이를 더했다. 보성의 한 마을은 그렇게 박유전의 소리를 품은 장소가 됐고, 강산리라는 이름은 강산제와 함께 전국 판소리사의 기억 속에 남았다. 여행자가 이곳을 찾는 일은 그래서 풍경을 보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한 지명이 어떻게 소리의 이름이 됐는지, 그 이름이 다시 보성의 문화적 자산으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를 듣는 일에 가깝다.
이름의 힘은 작지 않다. 강산제라는 이름이 없었다면 박유전의 소리는 여러 전승 가운데 하나로만 기억됐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름은 소리를 붙잡아 두는 그릇이 됐다. 장소가 소리를 품고, 소리가 다시 장소를 높이는’ 순환 속에서 강산제의 의미는 더욱 분명해진다. 강산제를 말할 때 소리의 미학만큼이나 지명의 운명도 함께 말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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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보는 사람의 길이었다
예술의 계보는 혈통만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스승의 호흡을 배우고, 한 대목의 숨을 통과하고, 장단 사이의 침묵까지 몸에 새길 때 계보는 살아남는다. 보성소리의 중심을 이루는 강산제 계통도 그렇게 이어졌다. 박유전의 소리는 정재근에게 전해졌고, 정재근은 조카 정응민에게 그 법제를 전했다. 정응민에게서 정권진으로 이어진 선은 보성소리의 뼈대를 세웠다. 강산제 전체의 전승을 말할 때 박유전의 제자인 이날치의 이름도 놓이지만, 보성을 중심으로 한 내림을 읽을 때 박유전-정재근-정응민-정권진의 길은 가장 선명한 축이다.
이 계보에서 중요한 것은 이름의 나열이 아니다. 소리가 한 사람의 목에서 다른 사람의 몸으로 옮겨 갈 때 무엇이 남고 무엇이 바뀌었는가다. 박유전의 소리가 강산리의 지명을 얻었다면, 정응민의 소리는 보성이라는 더 넓은 공간을 얻었다. 정응민은 큰아버지 정재근에게 박유전의 「심청가」·「수궁가」·「적벽가」를 배웠고, 김찬업을 통해 김세종의 「춘향가」를 배웠다. 서편제의 애절함과 동편제 계열의 단단함이 한 몸 안에서 만났고, 그 만남은 보성소리라는 이름으로 정리됐다.
보성소리는 강산제와 같은 말로만 볼 수 없다. 강산제 심청가는 보성소리의 핵심을 이루지만, 보성소리 안에는 김세종의 춘향가와 정응민·정권진으로 상징되는 정씨 가문의 내림 소리도 함께 자리한다. 그러므로 보성소리는 강산제 하나로만 설명되는 소리가 아니다. 보성이라는 장소가 여러 소리의 맥을 받아들이고 길러낸 지역적 전승의 이름에 가깝다. 그 큰 기둥 가운데 하나가 강산제이고, 그 기둥을 세우고 이어온 이름이 박유전과 정재근, 정응민, 정권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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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제와 보성소리의 관계를 이렇게 풀어내면 그 흐름을 한결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강산제는 보성소리의 중요한 뿌리 가운데 하나이고, 보성소리는 그 뿌리가 다른 소리들과 만나 자란 넓은 숲이다. 뿌리는 강산리라는 장소에 닿아 있고, 보성소리의 줄기는 정응민의 교육을 거쳐 제자들의 무대와 오늘의 축제로 뻗는다. 문화는 한 번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한 지역이 어떤 이름을 얻기까지는 장소와 사람, 배움과 기억이 긴 시간을 함께 견뎌야 한다.
이 점에서 보성은 차와 산, 바다와 벌교의 문학만으로 기억되는 고장이 아니다. 누군가의 성음이 오래 머문 곳, 제자가 스승의 소리를 따라 배우던 곳, 한 대목의 아니리가 마을의 저녁 공기를 흔들던 곳이다. 이 도시의 문화적 정체성은 관광 안내판보다 먼저 소리의 계보 속에서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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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한 명창, 보성을 교실로 삼다
정응민의 삶은 보성소리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문이다. 그는 1896년 전라남도 보성에서 태어나, 10대에 서울에 올라가 협률사 창극 공연 활동을 했다. 무대의 중심으로 나아갈 길이 열렸지만, 그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명창은 보성을 교실로 삼았다. 화려한 극장보다 마을의 방과 사랑채, 제자들의 반복되는 수련 속에서 소리를 다졌다.
그의 교육은 보성소리를 한 지역의 전통에 가두지 않았다. 오히려 보성을 한국 판소리의 큰 학교로 만들었다. 정응민의 문하에서는 김연수, 박춘성, 정권진, 성우향, 성창순, 조상현, 안향련 등 많은 명창이 나왔다. 한 스승의 방에서 나온 제자들이 훗날 판소리의 주류를 이루며 전국 무대로 나아갔다. 보성은 변방이 아니라 중심이 됐다. 중심은 서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래 지켜낸 소리가 있는 곳에 생긴다는 사실을 정응민의 삶이 보여 준다.
정응민이 지킨 것은 단순히 ‘옛 소리’가 아니었다. 그는 소리꾼이 배힘 없이 목끝으로 가볍게 내는 노랑목에 기대는 풍조와 청중이 애상적인 소리만 찾는 흐름을 경계했다. 청중이 애상적인 성음과 노랑목을 원해도 그는 쉽게 영합하지 않았다. 슬픔을 표현하되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고제의 법도와 단정한 품격을 갖춘 판소리를 지키는 것. 그것이 정응민이 생각한 보성소리의 길이었다.
좋은 목을 타고난 명창이 아니라 긴 수련 끝에 목을 얻은 명창이었다는 평가는 그의 소리를 더 인간적으로 만든다. 보성소리의 힘은 타고난 천재성보다 수련과 절제, 품격과 책임에서 나왔다. 이 점은 오늘의 지역문화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역의 이름은 우연히 커지지 않는다. 누군가 돌아와 오래 가르치고, 누군가 배운 것을 다시 무대에 올릴 때 지명은 문화가 된다.
여행자의 눈으로 보면 정응민의 귀향은 하나의 문화적 장면이다. 도시에서 성공을 좇는 길 대신 고향 보성으로 돌아와 사람을 길렀다. 그 선택이 훗날 보성소리라는 이름을 단단히 했다. 강산리라는 지명이 박유전의 소리를 만나 강산제의 이름으로 넓어졌다면, 정응민의 보성은 제자들이 자라며 그 소리를 이어 간 배움의 마당이었다. 소리의 이름을 오래 지키는 힘은 결국 사람을 길러내는 일에서 나왔다.
오늘 지역이 문화 자산을 말할 때 자주 놓치는 것도 이 대목이다. 문화유산은 건물이나 기념비만으로 남지 않는다. 누군가 반복해 배우고, 누군가 다시 가르치고, 누군가 다음 무대에서 자기 목으로 되살릴 때 비로소 살아 있는 유산이 된다. 정응민이 남긴 보성소리의 의미는 그래서 ‘전승’이라는 말보다 넓다. 그는 보성이라는 고장 안에 배움의 질서를 만들었고, 제자들은 그 질서를 따라 보성의 이름을 전국의 공연장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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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 보성의 소리를 다시 부르다
오늘의 보성은 이 오래된 소리를 축제로 다시 부른다. 서편제보성소리축제는 1998년 첫 회를 시작으로 이어져 온 보성의 대표 판소리 축제다. 축제는 단순한 공연 일정이 아니다. 한 지역이 자신을 어떻게 기억하고, 어떤 방식으로 다음 세대에게 전할 것인가를 묻는 문화의 장치다. 강산제와 보성소리는 무대 위에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경연과 공연, 체험과 순례를 거치며 오늘의 관객과 다시 만난다.
제28회 서편제보성소리축제는 다음달 2일부터 4일까지 보성군 일원에서 열릴 예정이다. 보성군이 주최하고 서편제보성소리축제추진위원회가 주관하는 이번 축제는 경연 체계를 넓힌 점이 눈에 띈다. 올해 처음으로 외국인부가 신설돼 판소리를 배우는 외국인들도 공식 경연 무대에 설 수 있게 됐다. 이는 보성소리가 지역 안에 머무르지 않고 세계의 귀와 만나는 통로를 넓힌 셈이다. 명창부 대상 시상금도 5000만 원으로 높아져 전국 소리꾼들의 참여를 넓히고 경연의 긴장감을 높이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축제의 중심에는 판소리와 고수 경연대회가 놓인다. 여기에 국내 정상급 국악인의 공연, 판소리 다섯 바탕 체험, 전통문화 만들기 체험 등이 더해진다. 판소리는 한 명의 소리꾼과 한 명의 고수, 그리고 청중이 함께 긴 이야기를 완성하는 예술이다. 그래서 보성의 소리 축제는 무대 위 공연에만 머물지 않는다. 관객이 듣고, 배우고, 따라 해보며 소리의 안쪽으로 들어가는 자리이기도 하다.
축제장에서 한 대목의 소리가 울릴 때, 관객은 단순히 공연을 듣는 데 그치지 않는다. 박유전이 머문 강산리, 정재근의 전승, 정응민의 귀향, 정권진으로 이어진 계보, 그리고 수많은 제자의 수련이 한꺼번에 무대 위로 올라온다. 북채가 첫 장단을 여는 순간 강산리라는 지명은 강산제의 기억과 겹쳐지고, 보성이라는 이름은 보성소리의 본향으로 다시 불린다. 행정구역의 이름이 문화의 이름으로 깊어지는 순간이다.
결국 보성소리와 강산제를 여행한다는 것은 장소의 깊이를 듣는 일이다. 우리는 흔히 여행을 눈으로 소비한다. 그러나 보성의 이 길은 귀로 읽어야 한다. 보이는 풍경은 조용하지만, 그 안에는 수백 번 되풀이된 발성, 스승의 가르침, 제자의 숨, 고수의 추임새가 켜켜이 남아 있다.
강산리라는 지명은 박유전의 소리를 만나 판소리사의 이름으로 넓어졌다. 한 마을의 이름이 소리의 그릇이 됐고, 그 소리는 다시 보성의 문화적 얼굴을 깊게 했다.
차밭의 초록과 일림산 철쭉, 벌교의 문학을 지나 강산리와 보성소리의 흔적까지 더할 때, 보성은 풍경의 고장을 넘어 소리의 고장으로 읽힌다. 지역의 힘은 특산물과 풍경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이야기를 품은 장소가 있고, 그 장소를 이어 온 사람이 있으며, 해마다 그것을 현재로 불러내는 축제가 있을 때 지역은 오래간다. 강산제는 강산리의 땅에서 이름을 얻었고, 보성소리는 정응민의 귀향과 제자 교육 속에서 지역의 정체성으로 자랐다. 차밭의 초록이 보성의 눈부신 얼굴이라면, 강산제와 보성소리는 보성의 깊은 목소리다. 그 목소리는 오늘도 말한다. 한 지역을 오래 살리는 것은 때로 길보다 소리라고.
성지용 기자 hoahn01@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