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삼성·앰코 896조, 서남권 산업지도 다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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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삼성·앰코 896조, 서남권 산업지도 다시 쓴다
메모리 팹 4기 신설 투자
전력·용수 기반시설 속도전
통합행정 실행력 성패 좌우
  • 입력 : 2026. 07.03(금) 10:23
  • 서은선 기자
지난달 30일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서남권 첨단산업 발전비전 국민보고회에서 정부 및 기업 대표들이 MOU 체결식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서남권이 수도권을 잇는 제2 반도체 생산거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정부와 SK하이닉스·삼성전자·앰코는 896조 원 규모의 투자 구상을 공식화하고, 메모리 반도체 팹 4기와 AI 데이터센터, 첨단 패키징 공장을 서남권에 구축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정부는 전력·용수 등 핵심 기반시설을 최대 100% 지원하고, 산업단지 조성 기간을 5년 이내로 줄여 투자 속도를 높이겠다는 방침이다. 지난 1일 출범한 전남광주통합특별시는 출범과 동시에 국가 첨단산업의 새 축을 만들 시험대에 올랐다. 896조 원 구상이 실제 공장 착공과 청년 일자리, 협력기업 유치로 이어질지는 부지 확정과 전력망 구축, 용수 확보, 인허가 속도에 달렸다.

896조 투자 새 산업축 부상

산업통상부는 지난달 30일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서남권 첨단산업 발전비전 국민보고회’를 열고 서남권 첨단산업 육성 전략을 발표했다. 행사에는 산업부와 재정경제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국토교통부, 기후에너지환경부 등 정부 부처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앰코 등이 참석해 ‘서남권 첨단산업 육성을 위한 투자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투자 규모는 총 896조 원이다. SK는 약 470조 원을 투입해 서남권에 메모리 메인 팹 2기와 1GW 규모 AI 데이터센터를 구축할 계획이다. 삼성전자는 425조 원을 호남에 투자해 서남권 메모리 팹 2기와 국가 AI 컴퓨팅센터 등을 조성한다. 앰코는 1조 원을 들여 광주에 첨단 패키징 팹 공장을 증설한다. 삼성전자와 SK의 투자만 895조 원에 이르며, 이 가운데 메모리 팹 4기 신설이 서남권 반도체 생산거점 구상의 핵심을 이룬다.
이번 발표는 단순한 지역 투자 계획이 아니다. 수도권 용인 클러스터를 중심으로 커져 온 국내 반도체 생산 축을 서남권으로 넓히는 국가 산업 재편의 신호에 가깝다. 반도체 공장은 한 번 들어서면 수십 년 동안 협력기업과 인력, 물류, 교육, 주거 기반을 함께 끌어온다. 공장 하나가 아니라 산업도시 하나가 움직이는 구조다. 서남권이 실제 생산거점으로 자리 잡으면 수도권에 집중된 반도체 산업 구조를 보완하는 새 축이 만들어질 수 있다.

수도권 넘어 서남권 새 축으로

기업들이 서남권을 주목한 배경에는 반도체 산업의 까다로운 입지 조건이 놓여 있다. 넓은 부지와 안정적인 전력, 대규모 용수, 빠른 물류, 숙련 인력이 동시에 필요한 반도체 공장은 수도권 중심의 확장만으로는 부지와 기반시설 부담을 풀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서남권은 대규모 산업용지와 교통망, 에너지 기반을 갖춘 데다 광주의 AI·자동차 산업, 전남의 재생에너지와 제조 기반을 함께 끌어안을 수 있어 생산거점으로서의 확장성이 크다. 여기에 첨단 패키징과 AI 데이터센터가 더해지면 생산과 데이터, 에너지, 후공정이 한 권역에서 맞물리는 산업 생태계로 이어질 수 있다.

용수·전력 확보가 첫 관문

정부가 가장 앞세운 것은 전력과 용수 등 기반시설 지원이다. 반도체 팹은 24시간 멈추지 않고 돌아가는 시설인 만큼 전력이 순간적으로 흔들려도 생산 차질과 불량이 발생할 수 있다. 초미세 공정에는 대량의 고품질 용수도 필요하다. 정부는 댐과 하수 재이용수 등을 활용해 용수를 공급하고, 팹 가동에 필요한 발전설비와 송전망을 신속히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전력과 용수 등 핵심 기반시설 구축 비용은 정부가 최대 100%까지 지원하는 방향으로 제시됐다. 대규모 반도체 투자는 공장 건설비만으로 움직이지 않고, 송전망과 변전소, 공업용수관, 폐수처리장, 도로, 물류시설, 주거단지까지 함께 갖춰져야 가능하다. 비용 부담이 불분명하면 기업은 투자 결정을 늦출 수밖에 없는 만큼, 정부가 기반시설 비용 부담 원칙을 앞에 세운 것은 지방정부와 기업에 투자 시계를 앞당길 수 있다는 신호를 준 것으로 읽힌다.
광주권 반도체 산단에는 하루 약 65만 t의 공업용수가 필요할 것으로 추산된다. 정부는 이를 맞추기 위해 동복댐 증고와 댐 여유수량 활용, 발전·농업용수 전환을 함께 추진한다는 방안을 내놨다. 핵심은 화순 동복댐이다. 기존 여유량 하루 5만 t을 우선 활용하고, 댐 높이를 올려 하루 25만 t을 추가 확보하면 동복댐에서만 하루 30만 t을 공급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여기에 주암·장흥댐 15만 t, 보성강댐 발전용수 전환 10만 t, 나주댐 농업용수 대체 공급 10만 t을 더해 필요 물량을 맞추겠다는 구상이다. 다만 용수 확보 계획이 실제 착공으로 이어지려면 관로와 정수시설, 농업·생활용수 조정까지 함께 풀려야 한다. 전력 역시 신규 발전설비와 송전망, 전력구매계약, LNG 열병합 등 세부 방식이 투자 일정과 맞물려야 정부 지원이 실제 착공으로 연결될 수 있다.

왼쪽부터 곽노정 SK하이닉스 대표, 전영현 삼성전자 부회장, 이진안 앰코테크놀로지코리아 대표가 지난 30일 서남권 첨단산업 발전비전 국민보고회에서 투자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산단 5년 조성과 규제 속도전

산업단지 조성 기간 단축도 핵심 과제다. 기존 절차대로라면 입지 선정과 보상, 인허가, 부지 조성, 공장 착공까지 10년 안팎이 걸릴 수 있지만, 정부는 이를 절반 수준인 5년 이내로 줄이겠다는 방침을 내놨다. 필요한 경우 인허가와 보상, 설계를 동시에 추진하고, 부지 조성과 공장 건축을 일괄·연계해 추진하는 패스트트랙도 적용하겠다고 밝혔다. 반도체 시장은 경기 순환과 기술 변화가 빠른 만큼, 5년이냐 10년이냐의 차이는 투자 성패를 가르는 시간표가 될 수 있다.
규제 완화와 세제 지원도 함께 추진된다. 정부는 제정 추진 중인 메가특구법에 따라 서남권에 최소 1곳 이상의 메가특구를 지정하고, 기업 투자 과정에서 걸림돌이 되는 규제를 한꺼번에 풀겠다는 구상이다. 기업과 근로자를 대상으로 한 지역별 차등세제 도입도 검토한다. 기업에는 투자 비용을 낮춰 주고, 근로자에게는 지방에 머물 동기를 제공해 생산시설과 인력이 함께 정착하는 구조를 만들겠다는 뜻이다.
다만 세제와 인허가 지원은 지역사회와의 균형 속에서 설계돼야 한다. 차등세제와 기반시설 지원은 기업 투자를 끌어내는 유인이 될 수 있지만, 그 효과가 일자리와 지역 업체 참여, 청년 정착, 정주 여건 개선으로 이어져야 지역사회도 투자의 의미를 체감할 수 있다. 지방세 증가와 환경관리 기준까지 함께 제시돼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특히 반도체 공장은 전기와 물을 많이 쓰는 산업인 만큼, 주민에게는 경제 효과 못지않게 환경과 안전, 생활 여건 변화가 중요한 문제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투자 초기부터 정보 공개와 주민 설명, 피해 예방 장치를 마련해야 뒤늦은 갈등을 줄일 수 있다.
이 같은 지원 체계를 총괄할 컨트롤타워도 마련된다. 정부는 반도체특별법에 따라 대통령 주재 반도체 특별위원회와 반도체 혁신성장지원단을 설치한다. 혁신성장지원단은 기업 투자가 제때 이행될 수 있도록 인프라 지원 방안과 세부 투자이행계획을 마련해 반도체 특별위원회에 보고하고, 정부는 이를 범정부 차원에서 뒷받침한다는 방침이다. 이는 서남권 반도체 투자가 한 부처의 개별 사업이 아니라 국가 산업 전략으로 다뤄진다는 뜻이다.

생산기지 넘어 반도체 생태계로

이번 투자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반도체 팹만이 아니다. SK의 1GW 규모 AI 데이터센터, 삼성의 국가 AI 컴퓨팅센터, 앰코의 광주 첨단 패키징 공장은 서남권 전략을 단순 생산기지 조성에서 AI 시대 반도체 생태계 구축으로 넓히는 핵심 요소다. 메모리 반도체를 생산하고, AI 연산 수요를 키우며, 후공정과 패키징까지 연결하는 구조가 갖춰지면 서남권은 공장만 들어선 지역을 넘어 수요와 생산, 연구와 실증이 함께 움직이는 첨단산업권으로 바뀔 수 있다.
AI 산업이 커질수록 고성능 메모리 수요도 함께 커진다. 데이터센터는 막대한 전력을 쓰면서 빠른 연산과 저장 능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메모리 팹과 AI 데이터센터가 가까이 배치되면 생산시설과 데이터 수요가 한 권역에서 맞물릴 수 있다. 광주가 AI 산업융합 집적단지와 국가 AI 데이터센터를 앞세워 온 점도 이 구상과 연결된다. 여기에 전남의 재생에너지와 해상풍력 기반, 광주의 AI 산업 기반이 결합하면 에너지와 데이터, 반도체 생산시설을 함께 묶는 산업 구조가 만들어진다.
앰코의 패키징 투자도 서남권 반도체 생태계의 중요한 축이다. 반도체 경쟁은 칩을 만드는 전공정에서 끝나지 않고, 여러 칩을 어떻게 쌓고 연결하며 열을 관리하느냐가 최종 성능을 좌우하는 단계로 옮겨가고 있다. 특히 AI 반도체와 고대역폭메모리 시장이 커지면서 첨단 패키징 역량의 중요성은 더 커지고 있다. 광주에 패키징 공장이 증설되면 메모리 생산과 후공정, 테스트, 장비 유지관리, 물류가 더 가까워지고, 지역 중소기업이 반도체 공급망에 참여할 여지도 넓어진다.

공급망·인재가 지역효과 가른다

지역경제 파급효과는 건설 단계부터 나타날 수 있다. 대형 팹 건설에는 토목, 전기, 기계, 배관, 공조, 클린룸, 보안, 폐수처리, 물류 등 여러 업종이 동시에 참여하고, 공장이 가동된 뒤에는 장비 유지관리와 소재·부품·장비 공급, 폐수·전력 관리, 시설 운영, 연구개발 인력이 계속 필요하다. 다만 대규모 투자가 지역경제 효과로 남으려면 지역 업체 참여 기준과 하도급 구조, 기술 이전, 인력 양성 계획이 함께 설계돼야 한다. 공장은 지역에 들어섰지만 일감과 인력이 외부에서 오가는 구조가 굳어지면 파급력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
지역 기업에는 기회와 숙제가 동시에 놓인다. 반도체 팹 공사는 고난도 품질 기준과 안전 기준을 요구하기 때문에 지역 건설·전기·설비 업체가 곧바로 핵심 공정에 참여하기는 쉽지 않다. 품질 인증과 안전관리 체계, 전문 인력 확보, 대기업 협력사 등록 절차를 지방정부와 상공회의소, 대학이 함께 지원해야 하는 이유다. 대형 투자를 바라보는 데 그치지 않고, 지역 업체가 실제 공급망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준비와 통로를 만들어야 한다.
인재 공급도 별도의 승부처다. 정부는 Arm 스쿨과 남부권 반도체 공대 등을 통해 첨단산업 인재를 양성하겠다고 했지만, 반도체 현장은 학과 하나를 만든다고 채워지는 영역이 아니다. 장비를 다룰 현장 인력, 공정과 품질을 관리할 전문 인력, 설계와 패키징을 맡을 고급 인력이 동시에 필요하다. 지역 대학과 직업계고, 기업 교육센터, 연구기관이 같은 교육과정을 짜고, 청년이 지역에서 배운 뒤 지역 기업에 취업해 주거와 생활까지 이어갈 수 있어야 투자 효과도 오래 남는다. 정부가 전남대 캠퍼스혁신파크, 광주 도심융합특구, 광주과학기술원 등과 연계해 산학연 혁신허브를 조성하고,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등 지방정부와 함께 교통·주거·교육·여가 등 정주 여건을 지원하겠다고 밝힌 것도 이 때문이다.

통합특별시 실행력이 핵심승부처

서남권 896조 원 투자 구상은 전남광주통합특별시 출범과 맞물려 더 큰 의미를 갖는다. 지난 1일 공식 출범한 통합특별시는 광주의 연구개발·AI 기반과 전남의 부지·에너지·항만 기반을 한 행정권 안에서 묶을 수 있는 구조를 갖추게 됐다. 서남권 반도체 구상이 실제 투자로 이어지려면 중앙정부 지원만으로는 부족하다. 부지와 인허가, 전력과 용수, 교통과 폐수처리, 정주 여건을 한꺼번에 조정할 지방정부의 실행력이 함께 움직여야 한다.
통합특별시가 풀어야 할 과제는 분명하다. 기업이 요구하는 부지를 빠르게 확정하고, 전력·용수·교통·폐수처리 계획을 중앙정부와 같은 방향으로 맞춰야 한다. 투자기업이 필요로 하는 주거와 교육, 의료, 문화, 교통 여건도 도시계획 안에서 함께 다뤄져야 한다. 여기에 지역 기업과 청년이 투자 효과에 참여할 통로까지 마련돼야 반도체 산업의 파급력이 지역 안에 남을 수 있다. 반도체 공장은 발표만으로 지어지지 않는다. 수많은 행정 절차와 이해 조정, 예산 배분이 맞아야 비로소 움직인다.
관건은 속도와 책임이다. AI 수요가 빠르게 커지는 지금 생산능력을 제때 확보하지 못하면 896조 원이라는 투자 규모도 지역의 경쟁력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서남권에는 큰 기회가 왔지만, 기회가 자동으로 산업도시와 일자리로 바뀌지는 않는다. 정부는 기반시설과 규제 완화, 세제 지원을 약속했고 기업은 대규모 투자를 제시한 만큼, 이제 통합특별시와 지역 대학, 기업, 주민이 투자 효과를 지역 안에 남기는 설계를 해야 한다.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 앰코의 896조 원 투자는 시작을 알리는 숫자일 뿐이다. 이 구상이 실제 산업도시 조성과 청년 일자리 창출로 이어질 때, 서남권은 수도권을 보완하는 제2의 반도체 심장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서은선 기자 hoahn0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