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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다에 뿌리내린 곤재의 학문
곤재 정개청은 1529년 나주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보성의 영주산사에서 학문을 익힌 그는 성리학에 머물지 않고 천문과 지리, 의약 등 여러 분야를 두루 탐구했다. 이후 박순을 비롯한 당대 학자들과 교유하며 시야를 넓혔고, 벼슬보다 연구와 후학 양성에 뜻을 뒀다. 만년에는 당시 무안현 엄담, 지금의 함평군 엄다면으로 옮겨 정사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엄다는 중앙 정치와 거리가 먼 곳이었지만, 정개청의 학문은 제자들에게 이어지며 호남 사림의 한 흐름을 이뤘다. 그는 성리학과 예학을 연구했고, 그의 문하에는 배움을 구하는 이들이 모여들었다. 가르침은 경전의 글귀를 외우는 데 그치지 않았다. 마음을 바르게 다스리고 의로움과 사사로운 이익을 구분하며, 배운 도리를 삶에서 실천하는 것이 그가 강조한 공부였다.
정개청이 엄다에 남긴 것은 한 학자의 이름만이 아니었다. 그의 가르침과 삶의 태도는 제자들에게 이어졌고, 이는 1616년 자산서원을 세우는 바탕이 됐다. 자산서원을 둘러보는 일은 한 인물의 생애를 되짚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중앙 정치의 격랑 속에서도 지역에서 배움의 맥을 잇고, 옳다고 여긴 가치를 지키려 했던 호남 사림의 선택을 만나는 일이다.
기축옥사가 삼킨 호남의 학자
1589년 일어난 기축옥사는 정개청의 삶을 뒤흔들었다. 정여립의 모반 고변에서 시작된 옥사는 관련자를 찾아내는 과정에서 호남 사림으로까지 번졌다. 정개청도 정여립과 뜻을 함께했다는 혐의를 받아 붙잡혔다. 이듬해 평안도 위원으로 유배된 뒤 함경도 경원 아산보로 옮겨졌고, 1590년 7월 유배지에서 생을 마쳤다.
정개청이 세상을 떠난 뒤 제자들과 지역 유림은 그의 억울함을 풀기 위한 신원운동에 나섰다. 지방 유림은 1616년 정개청이 제자들을 가르쳤던 엄다리 제동마을에 사우를 세우고 위패를 모셨다. 스승을 추모하고 제향을 이어가기 위해 마련된 이 사우가 자산서원의 출발이었다.
이후 정권과 당파에 따라 정개청에 대한 평가와 서원의 존폐는 여러 차례 흔들렸다. 그때마다 지역 유림은 상소를 올리고 서원을 다시 세우며 그의 학문을 이어갔다. 자산서원은 한 학자를 기리는 공간을 넘어, 호남 사림이 학문적 정통성과 자존을 지켜낸 현장이다.
다섯 번 훼철과 이어진 복설
자산서원은 창건 이후 다섯 차례 훼철됐고, 그때마다 지역 유림의 노력으로 다시 세워졌다. 1657년 서인계가 집권하면서 서원은 처음 훼철됐다. 이후 허목과 윤선도 등의 상소에 힘입어 1677년 복원됐고, 이듬해 조정으로부터 ‘자산’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사액은 정개청의 학문과 덕행, 그를 기리는 제향의 가치를 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했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조정의 공인도 서원의 존립을 지켜주지는 못했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자 서원은 두 번째로 훼철됐다. 유생들의 상소로 1689년 복설되면서 정개청의 동생 정대청도 함께 배향됐지만, 1702년 또다시 문을 닫았다. 1752년에는 ‘제동사’라는 이름으로 중건됐으나 1762년 훼철됐고, 1789년 다시 세워졌다. 마지막으로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철거되면서 제향도 중단됐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서원의 존폐는 흔들렸다. 그러나 지역 유림은 상소를 올리고 사우를 다시 세우며 정개청의 명예와 학문을 지켜냈다. 서원의 복설은 무너진 건물을 복구하는 일을 넘어, 정치적 판단에 따라 부정됐던 한 학자의 이름을 되찾는 과정이었다.
1868년 훼철된 뒤 자산서원은 오랫동안 터만 남았다. 그러나 정개청을 기리려는 흐름은 끊기지 않았다. 유림과 후손들은 1942년 옛터에 유허단향비를 세웠고, 광복 뒤인 1957년 서원을 다시 복설했다. 1988년에는 대규모 복원공사를 거쳐 오늘의 모습을 갖췄다. 오늘의 자산서원은 여러 세대가 정개청의 이름과 학문을 다시 세워 온 끝에 남은 공간이다.
목판에 남은 호남 사림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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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서원에는 정개청의 학문을 오늘까지 전해주는 유산이 남아 있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유산 제146호인 ‘곤재우득록목판’이다. 정개청의 글을 책으로 펴내기 위한 작업은 1689년 숙종의 명으로 시작돼 1692년 본편이 완성됐고, 부록은 1703년에 마무리됐다.
『우득록』은 본편 3책과 부록 1책에 모두 334편의 글을 담고 있다. 성리학에 관한 논설과 서문·기록을 비롯해 상소와 제문, 서한 등이 실렸고, 부록에는 정개청의 생애와 행장, 허목이 쓴 「곤재전」이 수록됐다. 정개청의 학문과 생각뿐 아니라 그를 둘러싼 인물들의 관계와 조선 후기 호남 사림의 활동을 살필 수 있는 기록이다.
목판은 같은 글을 여러 번 찍어 더 많은 사람에게 전하고, 한 세대의 학문을 후대에 남기기 위한 기록 수단이었다. 자산서원의 건물은 당쟁과 서원철폐령 속에서 거듭 허물어졌지만, 목판에 새겨진 정개청의 글은 다시 책으로 찍혀 사람들에게 전해질 수 있었다. 현재 남은 48매에는 사라진 목판의 빈자리와 함께, 그의 학문을 지키려 했던 이들의 노력도 새겨져 있다.
서원을 나서는 길에는 다시 엄다의 들녘이 펼쳐진다. 들어올 때 고요한 옛 건물로 보였던 서원은 돌아갈 때 전혀 다른 공간으로 다가온다. 자산서원의 깊이는 오래된 기와나 담장의 세월에만 있지 않다. 기축옥사로 유배지에서 생을 마친 스승의 이름을 되찾으려 했던 사람들, 다섯 번 허물어진 자리에 다시 기둥을 세운 사람들, 그의 글을 목판에 새겨 다음 세대로 넘긴 사람들의 시간이 이곳에 포개져 있다. 자산서원은 화려해서 기억되는 곳이 아니라, 지워질 때마다 다시 기억했기에 남은 곳이다.
김예영 기자 hoahn01@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