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 10·19사건 희생자 유해, 77년 만에 영면

구례
여순 10·19사건 희생자 유해, 77년 만에 영면
탄피·고무신이 말한 그날 참상
유전자 대조로 이름 확인 나서
상처 딛고 치유·화해 뜻 모아
  • 입력 : 2026. 07.23(목) 10:31
  • 김예영 기자
구례군 여순1019사건 희생자 유해발굴 봉안식을 진행했다. [사진=구례군]
구례 산동면 차독골의 흙 속에 묻혀 있던 여수·순천 10·19사건 희생자 유해가 77년 만에 예를 갖춘 안식처로 옮겨졌다. 이름도, 돌아갈 가족도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탄피와 고무신 곁에서 되찾은 유해는 오랜 침묵을 깨고 국가폭력의 진실을 다시 세상 앞에 드러냈다. 구례군은 지난 16일 구례실내체육관에서 유해발굴 봉안식을 열어 희생자의 넋을 기리고 유족의 아픔을 위로했다.

■ 77년 뒤 치른 뒤늦은 예우
이번 행사는 지난 2024년 구례와 지난해 광양에 이어 세 번째로 열린 여순사건 희생자 유해발굴 봉안식이다. 지난해 12월부터 차독골에서 벌인 발굴 성과를 유족에게 알리고, 수습한 유해를 모시기 위해 마련됐다.
지난 2024년 첫 봉안식에는 담양 옥천약수터에서 발굴한 유해 26구가 올랐고, 지난해 광양 봉안식에는 매티재에서 찾은 9구가 모셔졌다. 담양 유해 가운데 2구는 뒤에 유전자 대조로 신원이 확인됐다. 차독골 유해까지 더해지면서 발굴과 보존처리, 유전자 분석, 가족 인도로 이어지는 국가 차원의 수습 절차도 조금씩 자리를 잡고 있다.
봉안식에는 이개호·신정훈·용혜인 국회의원과 황기연 전남광주통합특별시 부시장, 이규종 구례유족회장이 참석했다. 서울과 여수, 순천, 광양, 보성, 고흥, 곡성 등 7개 지역 유족회장과 지역 사회단체장, 유족들도 자리를 지켰다. 추도사에 이어 추모 제례와 헌화가 진행됐다. 참석자들은 희생자의 넋을 기리고, 오랜 세월 가족을 잃은 아픔을 품고 살아온 유족들을 위로했다.
이날 자리는 단순히 유해를 옮기는 절차에 그치지 않았다. 국가폭력으로 삶을 빼앗긴 이들에게 뒤늦게나마 사회가 예를 갖추는 자리였다. 오랜 세월 아픔을 안고 살아온 유족들에게는 묻어둔 슬픔을 함께 나누는 시간이기도 했다. 참석자들은 아픈 역사를 잊지 않고 지역사회가 치유와 화해의 길로 나아가겠다는 뜻을 모았다.

■ 땅이 돌려준 탄피와 고무신
차독골은 지난 1949년 국군 토벌대가 민간인 30여 명을 총살한 뒤 인근 마을 청년들을 동원해 시신을 묻게 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구례에서 전북 남원으로 넘어가는 경계에 있는 외딴 골짜기로, 당시 토벌대 사령부가 있던 곳에서 약 4㎞ 떨어진 지점이다. 긴 세월 동안 주민들의 증언과 기억으로만 전해지던 현장이 발굴을 통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는 지난해 12월 차독골에서 본격적인 발굴을 시작했다. 조사단은 유해 5구와 부분 유해 2구를 수습했다. 현장에서는 탄피와 고무신을 비롯한 유류품 93점도 나왔다. 수습된 유해와 물품은 세척과 보존처리, 감식과 분석을 거쳤다.
탄피와 고무신은 당시 현장을 읽을 수 있는 중요한 단서다. 총격의 흔적과 평범한 주민의 삶을 함께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다만 전해진 희생 규모와 이번에 수습된 숫자 사이에는 차이가 크다. 묻힌 이들이 더 있는지, 희생자들이 누구였는지 밝히려면 문헌 조사와 증언 확인, 추가 발굴을 꾸준히 이어가야 한다.

여순 1019사건 유해발굴 봉안식. [사진=구례군]

■ 유전자 대조로 이름 찾는다
봉안식을 마친 유해는 세종 추모의 집에 안치됐다. 이곳은 전국의 민간인 집단희생 현장에서 발굴됐지만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유해를 임시로 모시는 시설이다. 위원회는 유족의 혈액을 채취해 유전자 정보를 확보한 뒤 발굴 유해와 대조할 계획이다. 일치하는 가족이 나오면 희생자의 신원을 확인하고 유족을 찾는 절차가 이어진다.
가능성은 이미 확인됐다. 지난해 위원회는 구례·광양·하동 유족 94명의 유전자와 광양·담양에서 발굴한 유해 35구를 대조했다. 그 결과 담양 옥천약수터에서 발굴한 유해 2구의 신원을 처음 확인해 가족에게 인도했다. 특별법에 따라 추진한 발굴 사업에서 나온 첫 신원 확인 사례였다.
하지만 70년 넘게 땅속에 있던 유해에서 온전한 유전자를 얻고, 비교할 가까운 유족을 찾는 일은 쉽지 않다. 시간이 흐를수록 생존 유족은 줄고 기억도 희미해진다. 신원 확인에는 유전자 대조뿐 아니라 유족의 적극적인 참여와 추가 조사도 뒤따라야 한다. 차독골 유해가 이름을 되찾으려면 유족 채혈과 자료 수집이 속도감 있게 이뤄져야 한다. 봉안은 끝이 아니라 가족을 찾기 위한 새 출발인 셈이다.

■ 진실 규명, 아직 절반의 길
여순 10·19사건은 지난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하던 국군 제14연대 일부 군인이 제주4·3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봉기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여수와 순천을 넘어 구례·광양·보성·고흥·곡성 등으로 충돌과 진압 작전이 번졌고, 그 과정에서 많은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특별법은 사건의 범위를 지난 1955년 4월 1일까지 전남과 전북, 경남 일부 지역에서 벌어진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의 민간인 희생까지로 정하고 있다.
지난 2021년 제정된 특별법은 지난 2022년 시행됐다. 사건 발생 74년 만에 국가 차원의 진상 조사와 희생자·유족 심사가 본격화한 것이다. 국무총리 소속 위원회는 진상 조사와 희생자·유족 심사, 유해발굴과 명예 회복 사업을 맡고 있다. 지방자치단체와 실무지원단은 신고 접수와 사실 조사, 유족 찾기를 돕는다. 결국 현장의 증언을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국가 기록으로 남기느냐가 진실 규명의 성패를 가른다.
여순사건 희생자·유족 지원시스템에 접수된 진상규명과 희생자·유족 신고는 모두 1만879건이다. 그러나 희생자 결정 처리율은 44.9%에 머물러 있다. 사건을 겪은 세대가 빠르게 줄고 있는 만큼 유해발굴과 신원 확인, 명예 회복을 더 서둘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장길선 구례군수는 “오늘 봉안된 영령들께서 못다 한 안식을 길이 누리시기를 온 마음을 다해 염원한다”며 “영령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진실을 기억하고 정의를 바로 세우겠다”고 말했다. 구례군은 앞으로도 역사적 진실을 알리고 희생자와 유족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추모·기념사업을 이어갈 계획이다.
차독골의 땅은 77년 만에 일부 진실을 내놓았다. 이제 남은 일은 유해에 이름을 돌려주고, 기다려온 가족의 품으로 보내는 것이다. 국가와 지역사회가 마지막 한 사람까지 책임질 때 봉안식에서 다짐한 치유와 화해도 비로소 완성될 수 있다.
김예영 기자 hoahn0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