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이 갈라놓은 화폭, 영암서 다시 만나는 정종여

문화
분단이 갈라놓은 화폭, 영암서 다시 만나는 정종여
37년 만에 다시 펼친 화폭
남북 작품 한자리서 만나다
월출산 아래 만나는 정종여
  • 입력 : 2026. 08.18(화) 10:45
  • 김예영 기자
정종여 묘향산 1956 종이에 수묵담채 72x194cm 유족소장
월출산 자락의 구림마을에 들어서면 돌담과 한옥이 이어지는 고즈넉한 풍경을 만난다. 이곳에 자리한 영암군립하정웅미술관에서는 지금 청계 정종여의 긴 화업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특별한 전시가 열리고 있다. 남한에서 활동하던 시절부터 월북 이후 북한에서 그린 작품까지 회화와 드로잉 등 63점이 한자리에 모였다. 서로 다른 시기와 환경에서 탄생해 좀처럼 함께 만나기 어려웠던 작품들이다. 광복 81주년을 맞아 마련된 특별전 ‘청계 정종여’는 한 화가가 시대의 변화 속에서도 이어간 그림의 여정을 따라가며 한국 근현대미술의 한 장면을 새롭게 들여다보는 자리다.

두 개의 시대를 건넌 한 화가

청계 정종여(1914~1984)는 일제강점기부터 해방과 6·25전쟁, 분단까지 한국사의 큰 변화를 온몸으로 지나온 화가다. 경남 거창에서 태어난 그는 넉넉지 않은 형편에서도 그림에 대한 뜻을 놓지 않았다.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미술학교에서 공부했고, 서울을 오가며 한국 산수화의 대가 청전 이상범이 이끌던 청전화숙에서 그림을 배웠다. 지난 1936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처음 입선한 뒤 여러 차례 입선과 특선을 거듭하면서 화단에 이름을 알렸다. 젊은 시절부터 꾸준히 작품을 내놓으며 자신만의 그림을 찾아갔다.

그가 화폭에 담은 대상도 다양했다. 산과 들의 풍경뿐 아니라 인물과 꽃과 새, 사람들의 생활 모습, 불화까지 다양한 소재를 화폭에 담았다. 특히 국내 곳곳의 산천을 직접 찾아 눈으로 보고 그리는 사생을 이어갔다. 전통 산수화의 먹과 붓을 기본으로 삼으면서도 자신이 현장에서 보고 느낀 산천의 모습과 분위기를 화면에 담으려 했다.

지난 1948년 그린 대작 ‘지리산조운도’는 이런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구름에 감싸인 지리산 능선을 긴 화면에 펼쳐 놓아 산의 크기와 깊이를 시원하게 보여준다. 전통 산수화의 틀을 바탕으로 실제 산을 바라보며 얻은 느낌을 더해 정종여만의 풍경을 만들어낸 작품이다.

분단 넘어 북에서 이어진 화업

6·25전쟁은 정종여의 삶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는 지난 1950년 9·28 수복 직전 북으로 건너갔다. 남한 화단에서 이름을 알리며 작품 활동을 이어가던 화가는 이후 북한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생활의 터전은 달라졌지만 그림과의 인연은 끊어지지 않았다.

정종여는 조선미술가동맹에서 활동했고, 지난 1954년부터 평양미술대학 조선화강좌 교원과 강좌장을 맡아 10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다. 작품을 그리는 데 그치지 않고 다음 세대의 화가를 키우는 일에도 힘을 쏟았다. ‘채색화에 대하여’, ‘묵화에 대하여’, ‘조선화 기법’ 등 그림의 표현과 기법을 다룬 글도 남겼다. 지난 1956년 ‘5월의 농촌’, 지난 1958년 ‘고성인민들의 전선원호’ 등을 발표하며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갔고, 지난 1982년에는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았다. 남한에서 시작한 그의 화업이 북한에서도 오랫동안 이어진 셈이다.

반면 남쪽에서는 월북 작가라는 이유로 그의 작품을 제대로 접하기 어려웠다. 지난 1988년 납·월북 미술인에 대한 해금 조치가 이뤄지면서 정종여의 작품도 다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지난 1989년 서울 신세계미술관에서 첫 회고전이 열리며 분단으로 가려졌던 그의 예술세계가 본격적으로 조명됐다. 이번 영암 전시는 지난 회고전 이후 37년 만에 마련된 자리로, 남과 북에서 이어진 정종여의 작품세계를 한자리에서 폭넓게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남북으로 갈린 화폭, 한자리에

이번 전시는 하정웅 선생이 영암에 기증한 하정웅컬렉션에서 시작했다. 소장품 가운데 북한 시기에 제작된 정종여의 작품 4점이 있었고, 영암군립하정웅미술관은 이를 계기로 ‘하정웅컬렉션의 작가들’ 시리즈의 주인공으로 정종여를 선정했다. 여기에 청계 정종여기념사업회와 유족의 협조가 더해지면서 남한과 북한 시기에 제작된 회화와 드로잉 등 모두 63점이 영암에 모였다.

전시에서는 유족이 소장해 온 북한 시기 대표작 ‘묘향산’과 ‘통군정’도 만날 수 있다. 지난 1956년 제작된 ‘묘향산’과 지난 1957년 그린 ‘통군정’은 긴 화면에 수묵과 담채로 산세와 풍경을 펼쳐낸 작품이다. 남한에서 우리 산천을 사생하며 화풍을 다져온 정종여가 월북 이후에도 산수를 어떻게 바라보고 표현했는지 살펴볼 수 있다.

이번 전시의 의미는 63점의 작품을 한자리에 모았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분단은 정종여의 삶을 갈라놓았고, 그의 작품 역시 남과 북에서 서로 다른 모습으로 기억돼 왔다. 남한에서는 근대 한국화가로 이름을 알렸고, 북한에서는 조선화를 가르치며 작품 활동과 미술 이론 연구를 이어갔다. 이번 전시는 그동안 따로 조명돼 온 두 시기의 작품과 활동을 한 화가의 생애 속에서 함께 바라보게 한다. 남한과 북한에 걸쳐 이어진 정종여의 삶과 예술을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자리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구림 돌담길 따라 만나는 예술

영암군립하정웅미술관이 자리한 구림마을은 월출산을 배경으로 옛 마을의 정취를 간직한 곳이다. 오래된 한옥과 돌담길을 따라 걷다 보면 마을 풍경 속에 자리한 미술관과 자연스럽게 마주하게 된다. 정종여의 작품을 감상한 뒤 다시 구림의 골목으로 나오면 전시장에서 만났던 산과 들, 나무와 풍경의 이미지가 월출산과 오래된 마을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관람을 마친 뒤에는 구림마을을 걸으며 영암도기박물관과 왕인박사유적지를 함께 둘러볼 수 있다. 미술관에서 한국 근현대미술을 만나고, 도기박물관에서 영암의 도기문화를 살핀 뒤 왕인박사를 기리는 공간까지 이어가면 서로 다른 시대의 영암 문화를 한 번에 만나게 된다. 한 화가의 작품을 보기 위해 시작한 발걸음이 오래된 마을과 도기, 역사 이야기를 만나는 문화여행으로 자연스럽게 넓어지는 셈이다.

특별전 ‘청계 정종여’는 오는 10월 11일까지 영암군립하정웅미술관 상설전시실에서 열린다. 광복 81주년을 맞아 마련된 이번 전시는 남한과 북한에서 이어진 정종여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만나며, 시대의 변화 속에서도 그림을 놓지 않았던 한 화가의 삶과 작품세계를 차분히 살펴볼 수 있는 자리다.
정종여 지리산 풍경 1938~40년 종이에 수묵담채 48x27 cm 유족소장

정종여 통군정 1957 종이에 수묵담채 72x194cm 유족소장
김예영 기자 hoahn0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