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품은 정자, 100년을 건너다… 구례 운흥정

문화
시를 품은 정자, 100년을 건너다… 구례 운흥정
시와 글이 머문 백년의 정자
운흥용소 품은 정자의 백년
현판에 남은 산동 선비의 삶
  • 입력 : 2026. 08.18(화) 14:27
  • 김예영 기자
장길선 구례군수가 운흥정 건립 100주년 기념행사에서 기념사를 전하고 있다.
지리산 자락에서 흘러내린 물이 암반 사이에 머물며 깊은 소를 이루는 구례군 산동면 운흥용소. 그 물길을 굽어보는 자리에 운흥정(雲興亭)이 서 있다. 화려한 누각도, 이름난 명승의 정자도 아니지만 이곳에는 한 시대를 살아낸 지역 선비들의 시와 글, 그리고 그 정신을 다음 세대로 이어가려 했던 마음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인 1926년 세워진 운흥정이 올해로 건립 100년을 맞았다. 한 세기 동안 같은 자리에서 물소리를 들으며 사람과 시를 품어온 운흥정은 이제 오래된 정자 한 채를 넘어 구례의 문학과 선비정신을 기억하는 문화공간으로 남아 있다.

선비들의 시로 세운 운흥정


운흥정의 역사는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0년대 산동 지역 선비들은 시사계(詩社契)를 꾸려 시를 짓고 글을 나누며 교유했다. 운흥정시사의 출발은 1924년으로 전해지며, 2년 뒤인 1926년 지역의 미풍양속을 이어가고 시문학의 기풍을 높이기 위해 운흥정을 세웠다. 사람들이 모여 시를 짓던 모임이 마침내 자신들만의 공간을 갖게 된 것이다.

당시 운흥정을 중심으로 한 활동은 단순히 경치를 즐기며 시를 읊는 풍류에만 머물지 않았다. 1930년 이도복이 남긴 ‘운흥정기’를 비롯한 기록에는 정와 박해창 등 지역 선비들이 이곳에서 시문을 나누고 학문과 세상사를 논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나라를 빼앗긴 시대에 한문과 한시는 오랫동안 이어온 학문과 문화를 지키는 수단이기도 했다. 선비들은 운흥용소의 물소리를 벗 삼아 정자에 모였고, 시를 읊고 교유를 이어갔다. 운흥정은 그렇게 산동 지역의 학문과 문학을 이어주는 구심점이 됐다.

백년을 이어온 운흥정의 글


운흥정의 지난 100년은 정자 안에 남은 글과 기록에서 더욱 또렷하게 드러난다. 건립 과정을 담은 상량문과 기문, 이곳을 찾은 문인들이 남긴 제영문과 시문이 여러 현판에 새겨져 있다. 정자를 세운 배경부터 당시 참여한 사람들의 생각, 운흥정을 바라본 문인들의 감상까지 한 공간에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현판에 새겨진 글을 따라가다 보면 운흥정이 어떤 공간이었는지도 알 수 있다. 누가 이곳을 찾았고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운흥정이 지역 선비들에게 어떤 자리였는지가 시와 문장 속에 담겨 있다. 정자 한 채를 둘러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안에 걸린 글을 함께 살펴봐야 운흥정의 지난 시간을 온전히 만날 수 있는 이유다.

운흥정의 전통은 정자를 처음 세운 사람들에게서 끝나지 않았다. 이후에도 시사회의 명맥이 이어지면서 운흥정은 지역 문인들이 모여 시문학 활동을 펼치는 장소로 남았다. 시대가 바뀌고 참여하는 사람도 달라졌지만 운흥정을 중심으로 한 문학 활동은 이어졌고, 선대가 남긴 기록 역시 후대에 전해졌다.

올해 건립 100주년을 맞은 운흥정은 오래된 건물과 그 안의 기록을 함께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눈길을 끈다. 상량문과 기문은 정자가 세워진 과정을 전하고, 제영문과 시문은 그곳을 찾았던 사람들의 생각과 모습을 보여준다. 운흥정의 100년을 돌아보는 일은 결국 정자에 남은 글을 통해 한 시대의 사람들과 그들이 이어온 문화를 다시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운흥용소에 깃든 옛이야기


운흥정은 산동면 시상리와 외산리 경계의 암반 위에 자리한다. 정자 아래로는 운흥용소가 펼쳐지고, 물길을 따라 크고 작은 바위와 숲이 이어진다. 암반 위에 놓인 정자는 주변 자연과 어우러져 운흥정만의 고즈넉한 모습을 보여준다.

마루에 앉으면 용소의 물소리가 가까이 들리고 건너편 산자락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봄에는 연둣빛 신록이 정자를 감싸고, 여름에는 짙어진 숲이 물가까지 내려온다. 가을이면 단풍이 암반과 용소 주변을 물들이며 또 다른 모습을 만든다. 계절마다 색을 달리하는 숲과 바위, 물길 사이에 운흥정이 자리하면서 한 폭의 그림 같은 장면을 빚어낸다.

정자에서 내려다보는 운흥용소에는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도 있다. 정자 맞은편에 자리한 구례 외산리 하연유적비에는 세종 때 전라도관찰사를 지낸 하연이 꿈에서 노인과 잉어를 만난 뒤 이곳에서 용을 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후 이 일대는 용이 나타난 곳이라는 뜻에서 용견지(龍見址)로도 불렸다. 이 이야기를 간직한 하연유적비는 조선 순조 때인 1811년 세워졌다.

암반 위의 운흥정과 그 아래 흐르는 물, 맞은편 하연유적비가 한 공간에서 어우러진다. 지리산 자락의 자연에 오래된 용의 설화와 역사까지 포개지면서 운흥정 주변은 정자만으로는 다 담기지 않는 또 하나의 이야기를 전한다.

운흥정의 다음 백년을 묻다


지난 1일 운흥정에서는 건립 10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장길선 구례군수와 운흥정시사회 김경일 회장, 구례군의회 문승옥 의장, 시사회 회원과 산동면민 등이 참석한 가운데 헌시 낭독과 기념비 제막, 기념식수 등이 이어졌다. 한 세기 전 선비들이 시와 글을 나누던 공간에 다시 사람들이 모여 지난 100년을 돌아보고 새로운 100년을 기약했다.

장길선 군수는 운흥정이 100년 동안 지역의 지성과 문화를 꽃피운 공간이라고 평가하며 역사와 이야기를 살린 문화관광 자원으로 이어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김경일 회장도 시문학 활동과 전통문화 계승을 이어가며 운흥정을 지역민과 방문객이 함께 찾는 문화공간으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운흥정의 100년은 정자 한 채가 오랜 세월을 견뎌온 기록에 그치지 않는다. 여러 세대의 사람들이 이곳을 지키고 시와 글을 남기며 전통을 이어온 시간이기도 하다. 1926년 선비들의 모임에서 출발한 운흥정은 이제 새로운 100년을 맞았다. 앞으로도 운흥정에 남은 이야기와 기록을 어떻게 보존하고 다음 세대에 전할 것인지가 또 하나의 과제로 남는다.
운흥정 [사진=한국관광공사]
김예영 기자 hoahn0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