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김진환의 지구별 여행

기고
건축가 김진환의 지구별 여행
아일랜드 남부의 시간 속을 걷다
  • 입력 : 2026. 08.21(금) 10:11
런던 여행을 마치고 우리 일행은 프린세스 크루즈를 이용해 북유럽 여행을 떠났다. 전날 잉글랜드 코른월 기항지는 높은 파도로 정박을 포기해야 했다. 배는 하루 더 바다를 가로질러 마침내 아일랜드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 코크(Cork)에 도착했다. 아침의 코크는 전형적인 북대서양의 날씨답게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짙은 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었다. 도시 이름인 ‘코크’는 아일랜드어로 ‘습지’를 뜻하는 말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이름처럼 도시 곳곳에는 리 강(Lee River)이 여러 갈래로 흐르고, 세계에서 가장 큰 천연항구 중 하나인 코브를 기반으로 과거 해상무역이 번성해 부유한 시절을 보냈다.

코크 국립 기념비.

우리 일행은 코브 크루즈 항에서 왕복 열차표를 구해 3량짜리 작은 열차에 올랐다. 바다와 호수가 뒤섞인 만을 따라 25분 정도 달리자 코크 시내 중심부에 도착했다. 역을 나와 전통 가옥이 늘어선 골목을 따라 걸으며 첫 번째 강가에 이르자, 코크 국립기념비(National Monument of Cork)가 우리를 맞았다. 이 조형물은 아일랜드 독립을 위해 싸우다 희생된 이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으며, 공동체를 위해 자신을 바친 사람들의 용기와 희생을 후세에 전하는 상징적 장소였다.

리 강을 건너 작은 언덕으로 향하면 엘리자베스 포트(Elizabeth Fort)가 강을 내려다보며 자리 잡고 있다. 성곽 위로 올라가면 성을 한 바퀴 걸을 수 있는데, 곳곳에 남아 있는 대포와 사격용 총안(총구멍)을 통해 당시 방어 전략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성곽을 따라 걷다 보면 아담한 코크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내부의 작은 박물관에는 성의 역사와 구조를 설명하는 자료가 전시돼 있으며, 죄수들 옛 감옥도 재현돼 있어 당시의 엄혹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창문에 사람 머리 모형이 걸려 있는 조형물은 당시 성을 지키기 위해 벌어졌던 공포와 희생의 단면을 보여준다.

핀 바레스 대성당.

성에서 나와 조금 걸으면 리 강 사이에 우뚝 선 핀 바레스 대성당(St. Fin Barre’s Cathedral)을 만난다. 고딕 양식의 화려한 외관이 인상적이며, 내부 천장과 벽면을 채운 스테인드글라스는 성스러운 빛을 뿜어낸다. 성당 둘레에는 오래된 묘비들이 이어져 있으며, 측면으로 돌아 나오면 거대한 고딕 양식의 버트레스가 지붕을 받치고 있어 건축적 위엄을 느끼게 한다.

잠시 도시의 분주함에서 벗어나고 싶어 피츠제럴드 공원(Fitzgerald Park)으로 향했다. 넓은 잔디밭과 조용한 호수가 있는 이곳은 코크 시민들의 휴식처다. 준비해 온 간식을 호숫가 벤치에서 나누어 먹으며 망중한을 즐겼다. 곳곳에서는 삼삼오오 산책과 조깅을 즐기는 사람들, 호수의 수련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긴 이들의 모습이 평화롭게 어우러지고 있었다.

다시 코브 항으로 돌아오자, 부둣가에 애니 무어 기념비(Annie Moore Monument)가 서 있다. 미국으로 떠난 첫 아일랜드 여성 이민자인 애니 무어가 두 동생과 함께 이곳에서 배에 올랐던 순간을 기념하는 조각상이다. 고향을 등지고 새로운 삶을 찾아 나선 수많은 이들의 희망과 이별의 이야기가 조용히 스며 있다.

그 옆에는 어두운 역사를 품은 루시타니아호 추모비(RMS Lusitania Memorial)가 자리한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으로 항해하던 여객선 루시타니아호가 독일 잠수함의 공격을 받고 침몰해 약 1,200명이 희생됐고, 이 사건은 미국이 전쟁에 참전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해안가를 따라 걸으면 ‘타이타닉’ 이름을 딴 카페와 레스토랑이 연이어 나타나는데, 이곳이 바로 타이타닉호의 마지막 기항지였기 때문이다. 런던 사우스샘프턴을 떠난 거대한 배는 이곳 코브에 잠시 들른 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비극의 항해를 시작했다. 지금은 작은 표지판 하나만이 그날의 슬픔을 간직한 채, 대서양 바람을 맞으며 조용히 그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타이타닉호 홍보물.


마지막으로 찾은 세인트 콜먼 대성당(St. Colman’s Cathedral)은 바닷가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으며, 전통적 회랑을 갖춘 장대한 성당이다. 성당 앞마당에서 내려다본 코브 항은 너무나 평화로웠다. 비극과 이별, 희망과 새로운 출발을 모두 품어온 이 도시에서 사람들은 오늘도 각자의 일상을 살아가며 또 다른 꿈과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