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반도체 ‘한목소리’…범시민추진위 출범

전남광주
호남 반도체 ‘한목소리’…범시민추진위 출범
각계 대표 150여 명 한자리
선도기업 유치와 인재 양성
전력·용수망 구축에 힘 모아
  • 입력 : 2026. 08.27(목) 10:16
  • 서은선 기자
민형배 전남광주통합특별시장이 24일 오후 광주상공회의소에서 열린 ‘호남권 반도체 클러스터 범시민추진위원회’에서 공동선언문에 서명하고 기념촬영하고 있다. [사진=전남광주통합특별시]
반도체 생산시설인 팹(Fab) 4기를 세우는 일은 기업의 투자 결정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공장을 돌릴 막대한 전력과 용수, 전문 인력, 도로와 주거시설을 제때 갖춰야 한다. 전남광주의 행정·정치·경제·교육·노동·시민사회가 이 과제를 함께 풀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지난 24일 출범한 ‘호남권 반도체 클러스터 범시민추진위원회’다. 320만 시민의 뜻을 모아 정부 지원과 기업 투자를 끌어내고, 지역이 성장의 성과를 함께 누리도록 만드는 민관 협력의 구심점이 첫발을 뗐다.

지역사회 한 테이블에

전남광주통합특별시는 지난 24일 광주상공회의소 대회의실에서 범시민추진위 출범식을 열었다. 민형배 시장과 송형곤 시의회 의장, 안도걸·신정훈·정진욱 국회의원, 한상원 광주상의 회장, 정은승 반도체전략위원장 등 각계 대표 150여 명이 참석했다.
참여 폭은 넓다. 광주상의와 통합특별시·시의회를 비롯해 GIST와 전남대·조선대·호남대 등 대학·연구기관이 이름을 올렸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언론·종교계, YMCA와 YWCA 등 시민사회단체도 힘을 보탰다.
추진위는 정부와 국회에 필요한 정책과 예산을 건의하고 국내외 선도기업의 투자를 돕는다. 시민에게 사업의 필요성과 진행 상황을 알리고 국가산단과 전력·용수·교통망을 제때 갖추기 위한 민관 협의도 이끈다. 삼성전자 DS부문 최고기술책임자를 지낸 정 위원장은 이날 강연에서 생산시설과 에너지, 소재·부품·장비 산업을 잇는 생태계 구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지역이 하나의 창구를 만든 데에도 의미가 있다. 부지와 인허가는 행정, 전력망은 정부와 한국전력, 용수는 여러 지자체와 수자원 관계기관이 얽힌다. 인재 양성과 협력기업 유치까지 따로 움직이면 일정이 늦어질 수밖에 없다. 추진위는 흩어진 요구를 모아 정부와 기업에 전달하고 쟁점이 생기면 지역 안에서 먼저 합의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여덟 약속, 실행의 틀로

참여 기관들은 이날 공동선언문을 채택하고 8대 실천과제를 내놨다. 시민 공감대 확산과 전문 인재 양성, 노사 동반성장과 상생문화 정착, 국가산단·기반시설 구축이 앞줄에 놓였다. 국내외 기업 유치와 산업생태계 조성, 청년·지역민의 좋은 일자리 창출, 지역사회 협력,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의 도약을 이끄는 역할도 약속했다.
선언이 실제 힘을 가지려면 기관마다 맡을 일이 분명해야 한다. 대학은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력을 키우고 노동계는 안정된 노사 관계를 만드는 데 힘을 보태야 한다. 경제계는 협력기업을 발굴하고 행정은 인허가와 기반시설을 책임져야 한다. 시민사회는 물과 에너지, 환경 부담을 따져 사업의 속도와 공공성이 함께 가도록 감시해야 한다.
민 시장은 “지역의 모든 역량과 지혜가 한데 모여 사업 성공을 이끌 추진력이 마련됐다”고 밝혔다. 이어 행정이 정책·제도를 뒷받침하고 투자 유치와 기반 조성이 흔들림 없이 이어지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대표위원들이 버튼을 누르자 호남에서 시작한 반도체 회로가 전국으로 퍼지는 출범 퍼포먼스도 펼쳐졌다.

같은 날 기업도 현장으로

출범식이 열린 날 SK하이닉스 경영진은 후보지인 광주 군공항을 다시 찾았다. 염성진 사장과 황무연·박호현 부사장은 부지와 주변 여건을 살핀 뒤 통합특별시 광주청사에서 전력·용수 공급과 기업 지원 방안을 협의했다. 시민의 결집과 기업의 현장 점검이 같은 날 이어지면서 투자 여건을 구체화하려는 움직임도 빨라졌다.
정부와 기업은 지난 6월 29일 투자계획을 공개한 뒤 지난달 6일 광주 군공항을 입지로 확정했다. 29일에는 이 일대를 국가산단 후보지로 정했고, 다음 날 한국토지주택공사(LH)를 예비 사업시행자로 지정했다. 약 250만 평의 군공항 부지는 이미 평탄화돼 있고 사유지 수용 부담이 적다는 것이 강점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각각 2기씩 모두 4기의 팹을 짓는 중장기 계획이다.
목표는 오는 2030년 6월 1단계 양산이다. 이는 팹 4기 전체를 완성한다는 뜻이 아니라 먼저 지은 일부 시설에서 첫 제품을 생산한다는 의미다. 정부와 시는 내년 산단 조성에 들어가 오는 2029년 말까지 1단계 전력·용수 공급 준비를 마치는 일정을 검토하고 있다.
일정은 빠듯하다. 팹 건물과 기반시설을 동시에 지어도 장비 반입과 시험 생산, 수율 안정화 과정을 거쳐야 한다. 통합특별시는 1단계 1만2000명을 포함해 모두 2만3000명의 인재를 키우고, 오는 2034년까지 공공·민간주택 7만9000호를 공급할 계획이다. 공장만 먼저 세워서는 사람과 기업이 뿌리내릴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속도만큼 중요한 시민의 몫

같은 날 광주시민단체협의회도 전일빌딩245에서 토론회를 열었다. 임문영 국회의원은 추진 상황과 정보를 계속 나눌 협의체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시민단체는 하수처리수 재이용과 재생에너지 중심의 전력 공급, 지역 법인화, 이익 공유 구조 등을 제안했다. 반도체 공장이 들어오는 데서 멈추지 않고 일자리와 세수, 협력업체 성장으로 성과가 지역에 남아야 한다는 요구다.
토론회에서는 오는 연말 조기 착공 방안도 거론됐다. 다만 이는 시민사회와 정치권이 제시한 목표일 뿐 정부와 기업이 확정한 공정표는 아니다. 군공항 기능 이전과 부지 인도, 국가산단 승인 절차가 남은 만큼 가능한 공정을 나눠 시작할 수 있는지부터 따져야 한다.
갈 길은 짧지 않다. 토지 수용 절차를 줄일 수 있어도 군공항 기능 이전과 산단 인허가, 송전망과 취수시설 건설은 남는다. 팹 4기 가동에는 6GW가 넘는 전력과 하루 65만t의 용수를 확보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물 공급이 댐 주변 주민의 희생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재이용수 확대와 주민 협의도 필요하다.
범시민추진위의 성패는 출범 행사가 아니라 이후의 실행에 달렸다. 공정표와 전력·용수 확보 상황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지역 인재 채용과 기업 참여 방안을 구체화해야 한다. 320만 시민의 결집이 중앙정부와 기업을 움직이는 힘이 되려면 속도와 함께 지역의 몫, 환경과 상생까지 한꺼번에 챙겨야 한다.
서은선 기자 hoahn0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