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빅토르 작가의 '홍범도 장군'.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거장 문빅토르는 붓으로 백년의 이산을 기록해 왔다. 1951년 강제이주 첫 기착지 우슈토베에서 태어난 그는 유화·아크릴·수채를 넘나들며 상처와 희망을 그렸다. 2024년 1월, 광주 고려인마을에 영구 귀환해 정착했고, 곧바로 자신의 이름을 딴 미술관이 문을 열며 새로운 서사가 시작됐다.

중앙아시아 초원에서 광주로

중앙아시아 초원에서 단련된 작가의 궤적은 단단하다. 1975년 알마티 고골 미술대학을 졸업한 뒤 약 20년간 카자흐스탄 국립고려극장 수석 화가로 활동했다. 작품은 대통령궁과 국립미술관 등에 소장되며 예술성을 증명했다. 러시아어권 평론은 그의 화면을 기하적 구조와 리듬으로 분석한다.

광주 고려인 마을에서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문빅토르 작가.

광주 정착은 공동체의 손길에서 가능했다. 고려인마을은 주거·작업·전시 공간을 제공했고, 작가는 홍범도 장군 초상 등 주요 작품을 기증해 감사의 뜻을 전했다. 2024년 3월 1일 광산구 월곡동 지원센터 2층에 ‘문빅토르 미술관’이 개관하면서 미공개작 50여 점이 처음 대중 앞에 섰다. 작은 전시실은 곧 디아스포라 기억의 거점이 되었다.

기억과 상상으로 그린 조국, 붓으로 채운 자긍심

문빅토르의 화면은 단순한 재현을 넘어 기억과 상상, 공동의 정체성을 호출한다. 〈수산시장〉(2022)은 바다가 없는 초원에서 자란 후손이 조국의 풍경을 상상으로 복원한 그림이다. 〈운명의 연대기〉(2025)는 강제이주, 전쟁, 노동과 유랑이 한 강물처럼 이어진 백년사를 응축한다. 〈도자기〉(2000)은 금이 간 그릇과 새 그릇을 대비해 순환과 비움, 다시 채움의 철학을 질문한다. 〈날아가는 사람을 본다〉(2025)는 타인의 성공을 바라보는 질투와 성찰을 특유의 빗살 점묘로 포착했다.

그의 붓은 역사의 빈 칸을 메우는 도구이기도 하다. 2023년 홍범도 논란이 거세졌을 때 그는 생전에 달지 못한 훈장을 단 장군의 초상으로 답했다. 빼앗긴 명예를 화폭에서 회복시키려는 시도였고, 고려인 후손에게는 자긍심의 장면이 되었다.


미술관은 ‘역사를 짓는 공방’으로 확장되고 있다. 고려인마을는 새 건립을 위한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며, 작품 경매 수익을 기금으로 모은다. 작품이 스스로의 집을 짓는 방식이다. 작가는 “조부모의 그리움이 들려준 풍경을 그리고 싶었다”, “오늘의 운명도 흐르고 있음을 기억하자”고 말한다. 그의 고백은 곧 선언이다. 광주의 작은 미술관에서 시작된 기록은, 흩어진 백년을 한 장의 화면으로 모으려는 집요한 의지다.

이제 과제는 연결이다. 학교와 마을, 연구자와 시민이 미술관을 매개로 대화할 때 작품은 역사 수업이 되고 자긍심의 회복이 된다. 문빅토르의 화폭이 보여준 것은 상처의 미학이 아니라 회복의 기술이다. 디아스포라의 지난날을 기억하는 일, 내일의 정체성을 단단히 세우는 일은 결국 같은 일이다. 광주에서 다시 쓰는 그의 연대기가 미래 세대의 손끝으로 이어질 때, 백년의 떠남은 귀환의 이야기로 완성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