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에서 집필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정찬주 작가.

계당산 산자락, 보성과 화순의 경계에 한 작가가 묵묵히 펜을 든다. 그의 선산과 태어난 마을은 보성에, 문학공원은 봇재 차밭 아래에, 그리고 그의 몸에는 보성의 바람과 물과 햇볕이 스며 있다. 소설가 정찬주. 그는 불교와 역사 속 인물들을 통해 인간 구원의 길을 탐색하며 자신만의 독보적인 문학 세계를 구축해왔다.

그의 글은 언제나 ‘오늘을 사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을 향한다. 시대를 넘어 인간의 내면에 천착해온 그에게 고향 보성은 단순히 풍경 좋은 고장을 넘어, 문학의 영감을 불어넣는 원천이자 역사의 성지다. 그와의 인터뷰를 통해, 60이 넘어 고향의 위인들을 소설로 길어 올리며 “조금은 염치가 생긴 듯하다”라고 말하는 거장의 깊은 사유와 후배들을 향한 따뜻한 조언을 들었다.

피톨에 스민 고향, 문학의 영감이 되다

정찬주 작가는 화순에 거처를 두고 있지만, 그의 문학적 뿌리는 보성에 깊이 박혀 있다. 그는 “저의 피톨 속에는 조상님들이 대대로 살았던 보성의 바람과 물과 햇볕이 가을날 여무는 곡식의 낱알처럼 스며 있다고 봅니다”라고 말한다. 그에게 고향은 물리적 공간을 넘어, 그의 존재를 이루는 근원적인 요소다.

이러한 연결은 그의 대표작인 대하소설 《이순신의 7년》 집필 과정에서 더욱 명확해졌다. 보성 열선루에서 큰 영감을 받았다는 그는, 그곳이 “임진왜란을 종식시키는 시발점의 성지라는 것도 새삼 깨달았다”라고 회고한다. 고향은 그에게 단순한 풍경이 아닌, 역사의 숨결이 살아있는 영감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또한 독립운동의 대부 홍암 나철, 이순신의 친구 선거이, 의병장 박광전과 안방준 등 보성이 배출한 위인들의 삶은 60이 넘은 그에게 새로운 창작의 불씨가 되었다. 그는 이분들을 모두 소설화하며 “고향 보성에 조금은 염치가 생긴 듯도 하다”는 겸허한 소회를 밝혔다.

이순신과 고승들에게서 찾은 ‘잊지 말아야 할 것’

그의 작품 세계는 역사적 인물과 한국의 고승이라는 두 개의 큰 축으로 나뉜다. 이순신, 정약용, 신미대사, 만해와 법정에 이르기까지, 그가 시대를 넘어 이들의 삶에 천착해온 이유는 단 하나, “오늘을 사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한국인의 덕목을 알리고자 그랬던 것 같다”는 것이다.

그는 이순신 장군에게서 네 가지 마음, 즉 한국인의 대표적인 덕목을 발견했다. 나라에 충성하는 충심(忠心), 부모를 잘 봉양하는 효심(孝心), 대의명분으로 살아가는 공심(公心), 그리고 멋과 흥이 있는 시심(詩心)이다. 그는 “원래 전통적으로 한국인이 가지고 있었던 4가지 마음을 이순신 장군이 크게 발현시켰다고 봐야 한다”라며, 영웅의 삶을 통해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정신적 자산을 탐색해왔음을 보여주었다.

그가 그려내고자 했던 ‘인간 이순신’의 핵심 역시 이러한 덕목에 닿아 있다. 20대 초반, 장인인 보성군수 방진을 따라 보성에 내려온 청년 이순신은 왜구의 노략질을 목격하고 문과에서 무과로 길을 바꾼다. 그때 그는 “나는 임금의 신하가 되기보다는 백성의 신하가 되겠다”라고 맹세한다. 작가는 이것이 바로 “힘없는 백성들과 그들 편에서 동고동락하는 모습”이야말로 인간 이순신의 진면목이라고 말한다. 이는 한자를 몰라 자기 의견을 밝히지 못하는 백성을 위해 사대부의 반대를 무릅쓴 세종대왕의 애민(愛民) 정신과도 맞닿아 있다.

길 없는 곳에서 찾은 길, 암자 기행의 깨달음

그의 탐구는 역사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저서 《암자로 가는 길》을 통해 전국 400여 곳의 암자를 순례하며 그는 또 다른 구도의 길을 걸었다. 그에게 고즈넉한 산사는 번잡한 세상을 벗어난 위안의 공간이자, 깊은 깨달음을 주는 장소였다. “더 이상 산길이 없는 막다른 암자들을 순례한 뒤 깨달은 점이 있다면 ‘길이 없는 곳에 길이 있다’라는 자각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산길은 암자에서 끝나지만, 그곳에서부터 또 다른 정신적인 인생길이 열린다는 것이다.

그는 암자를 “정신 수행자의 본향(本鄕)”이라 부른다. 시중드는 상좌 하나 없이 홀로 머무는 노승의 소박한 빨래, 그 한마디 한마디에 담긴 삶의 단단한 지혜는 지식이 넘쳐나는 광속의 시대에 시간이 멈춘 듯한 암자만이 줄 수 있는 큰 기쁨이자 위안이었다. 책의 광고 카피였던 ‘9시 뉴스가 없는 곳으로 가고 싶다’라는 문장은 지금 다시 보아도 명상적이고 시적인 수작이었다고 그는 회상한다.

글쓰기는 수행, 늘 깨어 있는 삶을 향하여

지금까지 150여 권의 책을 펴낸 그는 후배 작가들에게 ‘끊임없는 정진’을 강조한다. 그는 “글을 쓰는 것도 수행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수행하는 사람이 공휴일이라고 해서 쉬고, 명절이라고 해서 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숨을 쉬듯 계속 정진해야지요.”라고 말한다. 그에게 글쓰기는 자신을 성찰하는 행위이며, 이는 곧 ‘늘 깨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후배들에게 가장 강조하고 싶은 말은 ‘자작자수(自作自受)’, 즉 모든 인연은 스스로 짓고 스스로 받는다는 금언이다. “자신이 하는 일을 누가 알아주든 말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작자수이기 때문에 반드시 하늘이 감동하고 땅이 알아주는 날이 온다고 믿으니까요. 그러면 됐지 뭘 더 바라겠습니까?”

치열한 작가 정신으로 평생 펜을 놓지 않았던 그는, 스스로를 ‘전(前) 시인’, ‘전(前) 소설가’라 부르며 글쓰기를 멈춘 후배들에게 농담 섞인 일침을 가하기도 한다. 늘 깨어 있는 사람과 타성에 젖어 눈을 감은 듯 사는 사람의 차이는 클 수밖에 없다. 하늘과 땅이 알아주는 그 날을 믿으며, 그는 오늘도 묵묵히 자신만의 길을 걸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