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보성군 벌교읍 제석산 끝자락, 한 시대의 진실을 건축 언어로 번역해 세운 건물이 있다. 소설가 조정래 작가의 문학정신과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성과를 기리고 관람객들이 입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2008년 11월 문을 연 ‘태백산맥 문학관’이다. 문학관은 작품의 배경지인 벌교 현장과 인접해, 소설의 첫 장면들이 놓인 마을의 시간 위에 또 하나의 ‘기록 공간’을 포개놓는다.
문학관의 태동은 개관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벌교 일대에 소설 공간을 엮는 문학공원·문학로 조성 계획이 2000년대 초반부터 추진됐고, 이후 2007년 건물이 준공되어 이듬해 개관으로 이어졌다. 이 문학관은 『태백산맥』이라는 거대한 소설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의 역할을 하고 있다.

소설을 건축으로, 역사를 돌로 새기다
무엇보다 이곳은 ‘소설을 건축으로 구현’하려 한 의지가 명료하다. 건축가 김원은 작품이 파헤친 ‘매몰된 역사’를 드러내는 형상과 동선을 설계 개념의 축으로 삼았다. 문학관은 제석산의 등줄기를 ‘잘라낸’ 듯 산과 건물의 경계를 끊어, 바닥 낮은 지형 속으로 일부 지중화하고 두 개의 전시실을 공중에 매단 형태로 구성했다. 건물은 통일 염원을 담아 북향으로 배치되었고, 옥상에는 ‘새 역사’를 상징하는 유리탑을 세웠다. 전시장 옆 옹벽에는 이종상 화백의 대형 옹석 벽화 〈원형상–백두대간의 염원〉이 자리한다.
옹석 벽화는 이 문학관의 또 하나의 상징이다. 지리산과 백두산 등지에서 채집한 자연석 3만 8천여 개를 이어 만든 높이 8m, 폭 81m의 초대형 작업으로, 한국기록원에서 ‘한국 최대’ 자연석 벽화로 인증됐고 세계 기네스북 등재도 추진됐다. 문학·건축·미술 세 축이 한 자리에서 만난 협업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제작 주체(이종상 화백)와 설계자(김원), 원작자(조정래)의 이름이 함께 호명된다.

작가와 작품, 공간이 직조하는 서사
문학관이 이곳에 선 이유를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작가 조정래의 생애와 문제의식이 먼저 호출된다. 조정래 작가는 전남 순천(옛 승주군)에서 태어나 1970년 소설 『누명』으로 등단했으며, 한국 현대사의 큰 강줄기를 문학으로 가로지른 대하 3부작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의 작업은 식민지·해방·전쟁·산업화에 걸친 격동의 백 년을, 개인의 윤리와 민중사의 결을 함께 포착하려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 가운데 ‘벌교’라는 구체적 장소를 동학처럼 일으켜 세운 작품이 바로 『태백산맥』이다. 이 소설은 4년의 준비기간을 거쳐 1983년부터 1989년까지 6년의 집필 기간 끝에 전10권으로 간행되었다. 4부 구성으로, 여순사건 종결 직후에서 1953년 휴전 직후까지를 배경으로 좌우 이념 갈등, 토지·민족·분단의 중첩된 모순 속에서 길을 찾아가야 했던 민중과 지식인의 선택을 총체적으로 그렸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이 작품이 해방 공간과 전쟁을 ‘동적·총체적 관점’에서 복원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전시는 소설의 생성 과정을 시간의 축으로 펼친다. ‘소설을 위한 준비와 집필, 탈고, 출간 이후 작가의 삶’으로 연결되는 전시관을 통해 자료를 읽게 하며, 육필 원고와 취재 수첩, 메모·스케치, 관련 기사 자료 등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관람객들은 2층 공간에서 필사본 전시 등 독자 참여 기록 또한 마주치게 된다. 따라서 문학관의 전시는 단순한 작가 누적물의 진열이 아니라, 해방에서 전쟁으로 이어지는 공간의 기억과 인물의 윤리를 ‘현장, 문헌, 사료, 건축’의 교차점에 배치하는 장치에 가깝다. 1층 전시실의 통유리 너머로 옹석 벽화가 거대한 배경처럼 서 있는 장면은, 소설이 파고든 역사의 층위를 돌의 결로 환기한다.

문학관을 넘어, 벌교를 걷는 길
문학관 옆으로는 작품 속 장소인 ‘현부자네 집’과 ‘소화의 집’ 복원지가 이어져 있어, 관람 후 마을을 걸으며 서사의 촉감을 곧장 체감할 수 있다. 이 ‘걷기’는 문학관 밖으로도 연장된다. 보행 관광 코스 플랫폼 ‘두루누비’에 수록된 ‘태백산맥 문학기행길’은 문학관에서 출발해 회정리 교회·소화다리·보성여관·중도방죽을 거쳐 벌교 공용 버스터미널로 닿는 8km, 약 2~3시간 구간이다. 벌교 읍내의 돌담과 다리, 일제 강점기 흔적의 집들이 남긴 물성과 소설 속 장면들이 겹쳐 보이는 동선이다. 문학관이 ‘읽는 곳’이라면, 기행길은 ‘읽던 것을 걷는 곳’이다.
문학관 주변에는 소설의 흔적을 품은 장소들이 박물관처럼 흩어져 있다. 벌교 현장을 배경으로 조성된 ‘태백산맥 문학 거리’, 옛 보성여관 등의 공간은 문학관 관람과 연계해 취재·관광 기획을 구성하기에 적합하다. 보성군과 지역은 축제·문화행사와 연계한 문학기행 프로그램을 운영해 왔고, 옹석 벽화의 기록 도전 같은 문화 이슈도 지속적으로 생산해 왔다. 초기의 기록 시도 및 행사 연계 사례는 지역·전국지 보도에서 다수 확인된다.
문학관이 갖는 의미는 결국, 소설이 환기한 질문을 다시 지역의 일상으로 돌려보내는 데 있다. 현장의 돌과 흙, 건물의 그림자와 유리탑의 빛, 육필 원고의 잉크와 독자의 필사본이 한 자리에 모여,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인간에게 기여해야 한다’라는 작가의 오래된 문장을 현실의 자산으로 바꾼다. 벌교에서 『태백산맥』을 다시 읽는 일은, 박물관을 보는 일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딛고 선 자리의 이념과 생업, 갈등과 화해의 감각을 ‘현장’에서 갱신하는 일이다.

소설이 던진 질문, 공간이 되묻다
태백산맥 문학관은 한 권의 소설이 어떻게 시대를 증언하고, 공간을 기억하며, 미래의 질문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다. 작가의 치열한 집필 과정부터 건축가의 고뇌, 그리고 독자의 발걸음이 더해져 비로소 완성된 이 공간은, ‘인간의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소설의 근원적 질문을 우리에게 되돌려준다. 벌교에서 『태백산맥』을 만나는 일은 과거를 관람하는 행위를 넘어, 역사의 현장 위에서 오늘의 우리를 성찰하는 엄숙하고도 특별한 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