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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첫 불빛, 법성이라는 이름에 담긴 지시와 은유
백제 침류왕 원년으로 기록된 384년, 마라난타라는 승려가 백제에 들어와 불교를 전했다는 내용은 한국 고대사를 다루는 기본 문헌에 일치되게 등장한다. 그러나 그 기록은 상륙지의 구체 지명을 남기지 않았다. 텍스트의 공백을 메운 것은 지역의 지리와 항로, 해상 교역사, 포구의 성격을 종합한 현대의 비정 작업이었다. 법성포가 ‘성인이 불법을 들여온 성스러운 포구’라는 이름을 갖게 된 배경에는 이 같은 역사 인식의 축적이 놓여 있다. 영광의 도래지는 바로 그 해석의 결과를 공간으로 가시화한 사례다.
법성포라는 지명은 문자 그대로 풀이할 때 불교적 기호를 강하게 품고 있다. ‘법’과 ‘성’의 조합은 교법과 성인에 대한 지역적 기억을 환기한다. 이름은 역사적 사실의 단정이 아니라 지역이 공유한 상징과 정체성의 표지로 기능하며, 오늘의 방문객에게도 장소의 기원을 설명하는 교육적 장치가 된다. 지명에서 출발한 상징은 성역의 설계 언어와 안내 문안, 공간 동선의 명명에까지 관통해 사용된다.
성역화의 시간표, 지역의 결심과 실행
이곳의 성역화는 1990년대 중반 지역사회와 종교계, 지자체의 논의 속에서 시작됐고, 학술 검토를 거쳐 2000년대 중반 1단계 조성이 마무리됐다. 성역화는 단발성 행사가 아니라 장기 과업으로 추진됐다. 준공법회를 통해 공간의 성격이 공식화됐다. 총사업비는 시기와 매체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는 수치로 보도되지만, 핵심은 지역이 오랜 시간 공공의 자원을 투입해 상징 공간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있다. 이 과정은 지역 문화정책이 어떻게 ‘장소 만들기’로 구체화 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도 읽힌다.
도래지의 입구에는 간다라 건축 양식을 차용한 상징문이 서 있다. 이 구조물은 단순한 게이트가 아니라 공간 전체의 미적·서사적 톤을 미리 제시하는 장치다. 불교가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의 조형 언어를 매개로 동아시아에 전해졌다는 역사적 경로를 시각적으로 비유한다. 방문객은 상징문을 통과하는 순간, 고대의 해로와 교역로, 문화의 확산 경로를 상상 속에서 따라 올라가게 된다.
사면대불과 부용루, 이야기로 읽는 불전
이 도래지의 시선을 붙잡는 것은 20미터가 넘는 사면대불이다. 사면 구조는 한 점을 둘러싼 사방의 시야를 염두에 둔 배치로, 바다를 등지고 마을을 향하며 동시에 하늘과 뭍을 향한다. 장엄함은 규모에서 오지만 의미는 방향에서 온다. 사면대불은 과거의 도래를 기념하는 동시에 오늘의 영광을 축복하고 내일의 항로를 비춘다는 상징적 역할을 지닌다. 광장과 계단, 전망대와의 수직적 연동은 조형물의 상징성을 동선의 경험으로 변환해 준다.
사면대불 아래 동선은 부용루에 이른다. 누각의 내부와 외벽에는 부처의 일대기를 주제로 한 다면 부조가 23면에 걸쳐 촘촘히 배치되어 있다. 판면마다 장면은 상형 문자처럼 이야기를 간결히 압축해 전달하며, 관람자는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연속적 서사를 읽어낸다. 조형 언어를 통한 교육 기능이 강조된 구간으로, 앎과 체험이 동시에 일어나는 공간이다.
탑원, 탁트히바히의 원형을 불러오다
이곳의 핵심 축 가운데 하나인 탑원은 서역 불교유적의 대표적 상징 탁트히바히 사원 주탑원을 재해석한 구성으로 알려져 있다. 고대 스투파의 원형은 불교가 이동해 온 경로와 교리의 층위를 함축하며, 주변 석조와 조경은 그 상징을 현재의 풍경 속에 안착시킨다. 바다와 탑, 바람과 돌이 만나 만들어내는 장면은 원거리에서 봐도 또렷한 실루엣을 남긴다.
유물관은 간다라와 쿠샨 시대를 중심으로 한 불교 조형의 전개를 소개하는 해설형 전시로 구성되어 있다. 전시는 조각과 부조, 불전의 장면들을 통해 간다라 불교 문화예술의 특징을 직접 관람하고 느낄 수 있도록 한다. 유물·자료의 전시 형태와 소장 경위에 대한 안내가 강화될수록 공간의 학술성과 공공성이 함께 높아진다. 관람객에게 필요한 것은 진품 여부보다도 맥락화된 해설이며, 이 점에서 도래지 유물관은 텍스트와 도면, 동선을 활용한 해석적 전시에 주력하고 있다.
만다라광장과 108계단, 몸으로 새기는 의식
광장은 이 도래지의 리듬을 정돈하는 공간이다. 중앙부에서 사면대불을 향해 뻗은 108계단은 반복과 호흡을 통해 관람을 의례의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계단을 오르는 행위 자체가 고대의 시간과 오늘의 시간을 연결하는 체험으로 설계되어 있으며, 정상부에서 내려다보는 법성포와 바다는 공간 전체의 의도를 요약한 파노라마를 제공한다.
도래지는 엘리베이터와 경사로, 장애인 화장실과 전용 주차공간 등 기본적인 접근성 요소를 갖추고 있다. 공공 관광지로서 접근성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이며, 이곳은 최소한의 표준을 충족시키려는 노력이 확인된다.
숲쟁이꽃동산으로 이어지는 산책과 영광 투어 코스
도래지의 장점은 단독 목적지에 머물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인근 숲쟁이꽃동산과 연결된 산책로는 바다와 마을, 석조와 식생이 어우러진 복합 경관을 이룬다. 계절 화목과 초화의 변화는 대형 조형물 중심의 관람에 생태적 완충을 더하며, 가족 단위 방문객에게 휴식의 시간을 제공한다. 산책로에서 다시 포구로 내려오면 성역과 일상의 공간이 자연스럽게 맞물린다.
영광군은 도래지를 축으로 한 순환형 관광 코스를 운영해 왔다. 포구·숲·사찰·산책로를 엮는 코스는 이동 동선을 최소화하면서도 체류 시간을 늘리는 방식으로 설계되어 지역 상권과의 연결을 강화한다. 신앙 유적의 경건함과 생활 관광의 경쾌함을 한 코스에서 조화시키려는 시도는, 소멸 위험에 직면한 지역이 택한 지속 가능한 관광 전략으로도 해석된다.
유네스코의 경계, 혼동을 막는 설명
도래지는 백제사를 다루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세계유산은 공주·부여·익산 등 8개의 고고학적 유산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고, 영광의 도래지는 현대의 기념 공간이다. 따라서 보도와 안내에서 양자를 혼동하지 않도록 분명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이 구분은 도래지의 가치를 깎아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각각의 성격과 역할을 명확히 하는 데 목적이 있다.
마라난타의 정확한 출신 지역, 상륙 지점의 구체성, 항로의 세부에 대해서는 학계의 견해가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사료가 부족한 영역에서의 단정은 오히려 공신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 도래지는 이런 쟁점을 정면으로 인정하면서도 지역의 기억과 정체성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조형과 해설을 구성해 왔다. 사실과 상징 사이의 거리를 정직하게 공개하는 태도가 공간의 품격을 높인다.
바다의 기억과 포구의 풍경, 체류형 관광으로의 전환
법성포는 오래도록 군사적 거점이자 어업문화와 유통의 거점이었다. 파고와 조류, 갯벌과 모래톱의 형상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바다를 통한 전래의 서사를 설득력 있게 보조한다. 성역이 바다를 등지고 배치된 이유를 현장에서 체감하려면 바람이 트인 날 도래지 옆 공원의 전망대에 서 보는 것이 좋다. 물결과 조형물의 선, 마을의 지붕선이 한 화면에서 교차한다.
성역화는 단지 상징물을 세우는 일이 아니라 지역경제의 체질을 바꾸는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환승형 관광에서 체류형 관광으로의 전환을 유도하려면 숙박과 식음, 소규모 체험 콘텐츠를 촘촘히 묶는 운영이 필요하다. 도래지의 동선 설계는 이웃한 산책로와 문화시설, 포구 상권을 엮는 방식으로 체류 시간을 늘리는 데 초점을 맞춘다. 지역민의 일자리와 수익이 선순환해야 관광의 지속 가능성이 담보된다.
종교와 공공, 공존의 운영 원칙
신앙의 장소이자 공공 관광지라는 이중의 정체성은 운영상 섬세한 균형을 요구한다. 종교적 의례와 단체 관광이 충돌하지 않도록 시간대와 동선을 조정하고, 소음과 청결, 사진 촬영의 매너를 안내하는 기본 규범을 정착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공공성이 강조될수록 종교적 정체성이 옅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넓은 공감대를 얻을 수 있다.
도래지는 사진이 잘 나오는 공간이다. 그러나 대형 조형물의 위용만을 과도하게 부각하는 앵글은 이곳의 본래 취지를 약화시킬 수 있다. 부조 앞의 표정, 계단을 오르는 호흡, 바다와 스투파의 선이 함께 들어오는 구도를 통해 ‘기억할 만한 장면’을 건져 올리는 것이 바람직하다. 현장 사진은 곧 기록이며, 기록은 다시 장소의 의미를 새긴다.
교육과 해설, 지역 청소년과의 연결
도래지는 교과서와 현장의 만남을 구현하기 좋은 교육 현장이다. 지역 학교의 역사·윤리·문화 과목과 연계한 현장학습 프로그램을 체계화하면, 학생들은 문헌의 사건을 장소적 체험으로 복원할 수 있다. 유물관의 해설과 현장 답사의 워크시트를 연계해 ‘읽고, 보고, 쓰는’ 순환을 만들면 교육적 효과가 배가된다.
도래지는 ‘바다를 통해 들어온 사상’이라는 구조를 시각화한다. 이는 영광이라는 지역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동아시아 해양문화사의 일부다. 해로는 단지 교역의 경로가 아니라 언어와 미술, 종교와 관념이 이동한 길이었다. 성역의 조형 언어가 간다라를 호출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작은 포구가 세계사적 상상력과 만나는 접점, 그 지점이 이곳의 품격을 만든다.
역사적 사실과 지역의 해석 사이에는 언제나 틈이 존재한다. 도래지는 그 틈을 감추지 않고 안내문과 전시, 동선의 설계 안에서 투명하게 드러내는 방식을 택해 왔다. ‘확정된 사실’과 ‘지역의 해석’을 구분해 적시하면, 방문객은 이곳을 더 성숙하게 이해할 수 있다. 논쟁은 열린 채로 두되, 안내는 명확하게 하자는 운영 철학이 요구된다.
바다와 석조 사이에 선 질문
백제불교 최초 도래지는 과거의 사건을 오늘의 공간으로 번역한 기념물이다. 이곳은 어느 한 시대의 신앙만을 말하지 않는다. 지역이 스스로의 이름을 세우는 방식, 공공의 자원을 투입해 장기 과업을 완수하는 방식, 역사적 사실과 지역적 해석 사이의 균형을 찾는 방식을 말한다. 바다와 석조 사이에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에 도달한다. 과거의 빛을 오늘의 언어로 어떻게 전할 것인가. 도래지가 내거는 답은 소박하다. 정확한 사실, 정직한 안내, 열린 해석. 그 셋이 만날 때, 법성포의 바람은 오늘도 첫날처럼 불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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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정 기자 hoahn01@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