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 보리암 보제암 국가유산이미지

-달빛을 품은 산, 절벽 끝 작은 도량
담양호 수면 위로 아침 안개가 걷히면, 호수 북쪽을 감싸 안은 추월산의 능선 아래로 작은 암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호수와 절벽이 맞부딪히는 그 끝, 해발 731미터의 산이지만 달빛을 품은 이름처럼 기세는 높다. 이 절벽 끝 좁은 터에 내려앉은 도량이 바로 추월산 보리암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 본사 백양사의 말사이자, 1984년 전남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된 사찰이다.
보리암의 뚜렷한 기록은 조선 선조 대에 이르러서야 모습을 드러낸다. 정유재란으로 사찰이 전소된 뒤 1606년, 승려 신찬이 암자를 재건하면서 오늘의 보리암 역사가 시작된다. 그 뒤로는 평산 신씨 문중이 사실상 암자의 살림을 떠맡는다. 18~19세기에만 네 차례 이상 대대적인 보수가 이어졌고, 20세기 들어서도 불자들의 시주가 겹겹이 쌓이며 그 명맥을 이었다. 1980년대에는 성묵, 영공 스님 등이 법당과 요사를 정비하여 오늘날의 단정한 산중 사찰의 형세를 갖추게 된다.
하지만 산중에 전해져오는 보리암의 시간은 훨씬 오래다. 고려 보조국사 지눌이 지리산 무주암에서 수행하던 어느 날, 나무로 매 한 마리를 만들어 하늘로 날려 보냈더니 그 매가 추월산 바위 위에 내려앉았고, 그 자리를 불좌복전, 곧 부처가 앉을 자리이자 복의 밭으로 정했다는 이야기다. 창건의 연대와 주체는 문헌으로 단정하기 어렵지만, 사람들은 이 설화를 통해 보리암을 ‘견성성불의 성소’로 기억해 왔다. 거친 바위 벼랑 위 작은 마당과 단출한 법당, 그 위로 떠오르는 달빛이 만들어내는 풍경이 바로 그 믿음의 배경이다. 이름 그대로, 이곳은 세속을 잠시 내려놓고 마음속 달을 찾으려는 이들이 숨을 고르던 작은 피난처다.

-순절비와 현판이 말해 주는 장면들
보리암으로 오르는 가파른 산길이 끝날 즈음, 바위벽 아래로 낮은 비석 세 기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의병장 김덕령의 부인 흥양 이씨와 처남들의 부인, 그리고 김덕령의 매형 김응회의 어머니 창녕 성씨를 기리는 순절비다. 정유재란 때 왜군의 추격을 받던 이들이 끝까지 절개를 지키겠다며 이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진 이야기는, 보리암을 단순한 암자가 아니라 피비린내 나는 전란의 기억을 품은 장소로 만든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보리암 입구의 이 추모비들이 임진왜란 때의 담양 의병과 여성들의 비극을 고스란히 전한다는 점에서, 사찰의 역사와 지역 항일사의 현장 증거라고 평가한다. 법당 안으로 발길을 옮기면 또 다른 글자들이 벽을 가득 채운다. 무경 자수의 「추월산보리암기」와 신여도의 「보리암중수기」, 신재규의 「보리게판발문」이 한 판에 나란히 새겨진 현판이다. 남도문화연구에 실린 이종수 교수의 연구는 이 네 편의 기문(공식적인 사찰 역사 기록문)을 토대로 보리암의 굴곡진 시간을 복원한다. 기문에 따르면 보리암은 보조국사 지눌 혹은 무학대사가 처음 터를 잡았다고 적고 있지만, 조선 전기까지 이 암자를 입증할 유물과 문헌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실제 창건은 조선 후기에 이뤄졌을 가능성이 크다. 대신 17세기 이후 평산 신씨 일가가 여러 차례에 걸쳐 법당을 다시 세우고, 삼존불과 철솥과 같은 불교 유산을 시주하며 암자를 책임져 온 사실이 또렷하게 드러난다.
1607년 승려 신찬이 전란으로 무너진 암자를 다시 일으킨 뒤, 18~19세기 내내 평산 신씨 집안이 흙벽을 바르고 기와를 고치며 중수를 이어 갔다는 사실도 기문 속에 연도와 이름으로 남는다. 1630년 조성된 목조아미타삼존불의 복장문서에는 조각승 나균·뇌형·법란과 서산대사의 법손 소요 태능이 증명법사로 참여했다는 기록이 있어, 보리암이 당시 호남 불교 네트워크 한 고리였음을 일깨워 준다.

-오늘의 추월산 보리암, 우리에게 남는 질문
지금의 보리암은 대웅전 하나와 요사 몇 칸, 마당 한가운데 묵묵히 앉은 옛 쇠솥이 전부인 작은 암자다. 그러나 추월산의 능선을 타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오르던 이들이 좁은 마당에 첫 발을 딛는 순간, 가장 먼저 내뱉는 말은 “참, 자리 한번 묘하다”는 탄성이다. 절벽 끝으로 성큼 나간 마당 아래로 담양호가 푸른 그릇처럼 펼쳐져있고, 저 멀리 무등산과 지리산 능선이 옅은 선으로 포개어진다. 이 압도적인 시야 위에 정유재란 순절의 기억과 평산 신씨 문중의 기도, 스님과 신도들이 이어 온 부흥의 서사가 한 겹씩 차곡차곡 포개진다.
암자의 법당 안, 다소곳이 모셔진 목조아미타삼존불 앞에 앉아보면 감정의 결은 한층 또렷해진다. 전란 직후 ‘다시 일어서겠다’고 다짐하며 칼과 끌을 쥐었을 조각승들의 숨결이 오늘의 방문객 호흡과 맞물린다. 누군가는 집안 내력으로 전해지는 전쟁의 상흔을 떠올리고, 누군가는 도시에서 쌓인 번아웃과 인간관계의 무거운 피로를 내려놓기 위해 이 가파른 산길을 오른다. 절 아래에서 짐을 실어 나르는 화물 리프트의 이름이 ‘비룡’인 것 또한 상징적이다. 옛 설화 속에서 나무 매가 이 터를 향해 날아왔다면, 오늘의 비룡은 지친 도시 사람들의 근심과 소원을 실어 나르는 철의 새다.
해가 서쪽 산등성 너머로 서서히 기울 무렵, 난간에 선 사람들의 얼굴을 붉은 빛이 차분히 물들인다. 호수 위로는 달빛 한 조각이 미끄러지고, 바위 틈에 뿌리 내린 대숲이 바람에 울면, 보리암은 화려한 관광지가 아니라 각자가 품어 온 질문을 조용히 데리고 올라와 잠시 내려놓는 산중의 고요한 쉼표가 된다. 답을 찾지 못한 채 어지러운 마음으로 올랐다가도, 내려가는 발걸음만큼은 조금 가벼워지는 까닭을 사람들은 굳이 말로 규정하지 않는다. 그저 이 바위 끝 작은 암자가 세기와 정권을 넘어 묵묵히 지켜 온 시간의 두께가, 오늘도 말 대신 그들을 배웅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