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내산서원 용계사

-불갑산 자락, 잊힌 서원이 돌아오다
불갑산 자락 내산서원 마당에 들어서면 먼저 귀를 스치는 것은 물소리가 아니라 적막이다. 붉게 물든 단풍잎이 느리게 떨어지는 사이, 낮게 깔린 전각들이 몸을 낮춘 채 산을 향해 절하고 있다. 이 고요한 공간의 주인은 ‘일본 성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영광 출신 학자 수은 강항이다. 그의 이름을 붙인 서원은 아니지만, 이곳의 첫 이름은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용계사’였다. 인조 13년인 1635년, 강항이 세상을 떠난 지 꼭 18년 되던 해에 전라감사와 향리, 지역 유림이 힘을 모아 사우 건립을 추진한다. 그의 태생지인 불갑면 금계리 서봉마을에 처음 세워졌지만 이듬해 화재를 겪으면서 자리를 옮겨야 했다. 이후 불갑면 쌍운리에 다시 터를 잡았고, 숙종 28년인 1702년에 대대적인 중수를 거치며 서원의 용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앞에서 용계사는 다른 서원과 다르지 않았다. 1868년 훼철된 뒤 긴 세월 터만 남은 채 잊혀져 버렸고, 강항을 기리던 사당도 역사의 그늘로 밀려났다.
반전은 1970년대에 찾아온다. 후손과 유림이 다시 뜻을 모아 불갑산 자락 현재의 자리로 서원을 복원하고 이름을 ‘내산서원’이라 고친 것이다. 1977년 전라남도 기념물 제28호로 지정되면서, 한때 사라졌던 서원은 지역 사림의 기억 속으로 다시 당당히 돌아왔다. 경내에는 강항 위패를 모신 용계사와 강당, 내외삼문이 차례로 서 있고, 왼편 비탈에는 장서각 경장각이 자리한다. 이곳에 전남 유형문화유산인 『강감회요』 목판과 『수은집』, 『운제록』, 『문선』, 『간양록』 필사본이 보관돼 있다. 강항의 생애가 압축된 이 책들이 내산서원의 심장이다. 그래서 서원에 들어서면 책 냄새부터 난다.

-포로 학자 강항, 죽음 대신 기록을 택하다
내산서원의 주인공 수은 강항의 삶은 서원만큼이나 기구하다. 1567년 영광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글 읽기를 좋아해서 이웃 어른들로부터 “조선의 재목이 되겠다”는 말을 들었다. 총명했던 어린 시절 그대로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진사가 되었고, 뒤이어 문과에 급제해 공조와 형조 좌랑을 지낸 엘리트 관료로 조정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의 인생을 비튼 것은 정유재란이었다.
1597년 휴가를 나와 고향에 머물던 그는 남원으로 내려가 군량을 보급하고, 다시 영광에서는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집해 ‘글 읽는 선비’가 아니라 ‘싸우는 관리’로 전장을 누볐다. 하지만 왜군의 파도는 생각보다 거셌다. 영광 염산 논잠포구에서 가족과 함께 피난선을 기다리다 왜군들에게 포위되자 그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고 여겼다. 강항은 아들들의 손을 잡고 스스로 물에 몸을 던졌지만, 기가 막히게도 죽음마저 허락되지 않았다. 살아난 그는 쓰시마와 시코쿠 오즈성을 거쳐서 일본의 포로가 된다. 많은 이들이 절망 속에 주저앉을 그 자리에서, 강항은 죽음 대신 기록과 교육을 택했다. 그는 승려 요시히토와 교류하며 일본의 지리와 제도, 군사 상황을 꼼꼼히 정리한 ‘적중문견록’을 몰래 본국에 보냈고, 탈출에 실패해 처형장까지 끌려갔으나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이어 교토 후시미성에서는 후지와라 세이카를 만나 조선의 주자학을 전했다. 그리고 사서오경에 일본어 훈점을 단 교재를 만들어 주며 포로 신세로 한일 학문의 통로를 열었다.
3년 뒤 귀국한 그는 포로 시절의 일기와 상소, 보고를 묶어 ‘간양록’을 남긴다. 포로로 끌려간 백성과 학자들의 참상, 적국의 실정, 전란 이후 조선이 나아가야 할 방향까지 함께 담은 이 기록은, 한 선비가 몸으로 써 내려간 ‘전쟁 백서’였다. 스스로를 죽지 못한 죄인이라 부르면서도, 그는 끝내 붓을 놓지 않았다.

-단풍 서원에서 마주 보는 오늘의 질문
오늘의 내산서원은 전쟁의 기억 대신 바람과 책 냄새만 남은 산중 서원이다. 불갑사에서 차로 얼마 되지 않는 거리, 가을이면 진입로와 충의문 주변이 단풍으로 붉게 번진다. 새벽 무렵이면 안개가 골짜기를 채우고, 낮게 울리는 종소리와 함께 서원의 지붕들이 물안개 속에서 서서히 윤곽을 드러낸다. 여행 안내서에 굵은 글씨로 박힌 명소는 아니어서, 몇몇 여행자가 불갑산 억새밭과 불갑사를 보고 돌아가는 길에 들러 조용히 둘러볼 뿐이다. 그러나 한 번 발을 들이면 풍경은 의외로 깊고 고풍스럽다.
강당 마루에 올라앉으면 나무 기둥마다 손때가 배어 있고, 장서각 안에서는 강항이 남긴 목판과 필사본이 묵묵하게 세월을 견디고 있다. 산기슭에는 강씨 문중 묘역이 고요히 둘러앉아 서원을 감싸고, 제향일이면 후손과 유림들이 정갈한 제수를 차려 옛 의례를 이어 나가고 있다. 돌계단을 한 계단씩 밟고 오르다 뒤돌아보면 붉은 잎 사이로 영광 벌판과 서해가 어른거린다. 이때 비로소 ‘변방 고을의 한 선비’로만 여겨졌던 강항의 궤적이 동아시아 전체를 관통하는 거대한 선으로 그려진다. 쓰시마와 오즈성, 교토 후시미성으로 이어지는 지도 위의 점들이 내산서원 마당에 겹쳐지면서, 이 산중 서원은 더 이상 조용한 지방 서원이 아니라 역사를 사유하는 하나의 거대한 서재로 변모한다.
내산서원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당신에게 전쟁과 재난이 닥친다면, 무엇을 남기겠는가.” 강항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기록과 교육을 택했고, 그 선택이 400년 뒤 일본 성리학의 뿌리이자 한일 교류사의 첫 장으로 남았다. 오늘 내산서원을 찾는 이들은 그 흔적 위를 천천히 걸으며 자신의 언어와 기록, 책임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내산서원은 과거를 기념하는 공간을 넘어서,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각자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양심의 거울이 된다.